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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Apr 29. 2022

여름, 추억의 또 다른 이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책을 펴고 첫 장의 몇 줄만 읽어도 나랑 궁합이 잘 맞는 책인지 아닌지 금방 알아챈다. 궁합이 잘 맞는 책은 바람 찬 겨울날 멀리서 풍겨오는 호떡 냄새에 몸이 알아서 반응하듯이 감각적으로 나를 사로잡다. 그런 책을 읽다 보면 몸 구석구석까지 찌르르하게 전류가 흘러드는 것 같은 떨림을 느끼곤 한다. 때론 가슴이 아리고 목이 메어와 먼 하늘을 보며 잠시 숨 고르기를 할 때도 있다. 그때 분비되는 세로토닌 덕분에 까칠한 나도 잠시나마 너그러워진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책을 읽었다. 가슴 뭉클해지는 장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자극도 없었지만 잔상이 오래 남은 책이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수 위에 떠 있는 나뭇잎을 보는 느낌이랄까. 아주 천천히 천천히 이동하기에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흘러가기는 하는 것인지 알아채지 못하지만 눈을 뗐다 다시 보면 어느새 다른 곳에 가 있는, '언제 저기까지 갔지?' 싶은 마음에 눈을 떼지 못하고 보게 되는, 호수 위에 떠 있는 나뭇잎 같은 작품을 읽었다. 마쓰이에 마사시가 쓴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이다.  


 이 작품은 '여름 별장'의 아침 풍경을 묘사하며 시작된다. 그 풍경을 읽다 보면 새벽 어스름 속에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는 키 큰 나무들이 눈앞에 서 있고 새들의 맑은 지저귐이 들릴 것만 같다. 숲의 정령들이 내뿜는 입김에 힘껏 기지개를 켜는 생명들이 만들어낸 풍경. 그 풍경 곳곳에 숲 속에서 맞이하는 아침의 청신함이 묻어 있다. 그렇게 여름 별장에 매료되어 함께 아침을 열고난 뒤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어 졌다.


그리고 화자가 띄운 나뭇잎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서 눈여겨보게 된다. 잔잔한 물결에 실려 미세하게 움직이는 나뭇잎을 따라가다 보면 약간은 지루한 감도 없잖아 있지만 그것은 마치 햇 뜨겁고 쾌청한 여름날 오후에 마루 끝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여름 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나른함이라고 할까.


그 나른함을 즐기며 나뭇잎을 따라가는 일을 계속하다 보니 이게 웬 일, 잔잔할 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 같던 호수 여기저기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갈대와 부들과 수련들이 있고 물속에 몸 절반을 담그고 서 있는 나무들도 있지 않은가. 그 모든 것들은 잔잔한 호수와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 마음속에는 호수의 물비늘 같은 반짝임이 남아 있게 되었고 이 작품을 떠올리면 마음속에  애잔함이 일렁이곤 했다.


청춘의 한 때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 중에는 아주 강한 파동을 전달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80년대와 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 중 개인의 신념이 이데올로기와 부딪혀 생겨난 갈등과 절망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들을 접할 때이다.


소설가는 사회문제와 진실에 눈을 감아서는 안되며 그런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여전하지만 한때 그런 작품을 쓰는 작가의 책만을 즐겨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책을 읽어야 했던 시절을 살아와서 인지 아니면 내 청춘이 지리멸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나는 소설 속 모든 청춘은 강렬하고 뜨겁고 회한이 남는 계절로 그려져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읽은 책 속 청춘은 대개 무너지거나 아프거나 절망하고 좌절하는 가운데 인간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 고뇌하는 캐릭터가 대부분이었다. 젊음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 별장'에서는 그 흔한 청춘의 고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랑마저도 뜨겁거나 강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미지근했다. 이를테면 춘곤증에 빠지기 좋은 봄날 같은 여름이라고 할까.


 여름이라면 태양이 작열해야지, 라는 고정관념을 깨버린 작품이었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여름날에도 봄날 같은 온화함 속에 꽃이 피고 지고, 또 다른 꽃이 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작품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젊음이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강하지 않아도 되는, 뜨겁지 않아도 되는, 깊은 고뇌 없이 나른할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을 누려도 되는, 그런 젊음이어도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음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기도 했다.  


책을 덮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았다. 잔잔한 수면일수록 윤슬이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것처럼 이 소설이 평화로운 여름 한낮 오후 같은 이야기였기에 마음에 오래가는 잔상을 남겼다는 것을. 강렬하지 않기에 작품에 내재된 시간의 속성이 쓸쓸함과 애잔함을 배가시켰다는 것을.


어떤 삶이든 시간이 가진 속성은 어김없이 적용된다. 지나간 시간들이 아름다운 것은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로웠던 지난날, 세월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시간들, 모든 스러져간 것들을 떠올릴 때 '쓸쓸함과 애잔함'이 함께 밀려드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생을 사계절에 비유했을 때 지금 나는 어느 계절을 지나고 있을까.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한때 여름 땡볕처럼 뜨겁고 열정이 가득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여름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내 생애 내가 땀 흘리며 건너온 그 여름이 영영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억에서 사라졌을 뿐 내 몸 어딘가에는 그때 느꼈던 한낮의 뜨거운 하늘과 대기를 뚫고 쏟아지던 빗줄기의 시원함과 염분을 가득 머금고 불어오던 바닷바람의 비릿함이 아직도 감각적으로 남아 있다. 그런 여름이 있었기에, 그런 여름을 무사히 잘 지내왔기에 지금 이 계절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면 나는 또 다른 어느 한 계절의 초입에서 지금 이 계절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초가을이거나 어쩌면 만추의 어디쯤일지도 모르는 이 계절을. 나의 이 계절은 '슌스케의 여름'처럼 내가 머문 이곳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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