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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당구장[1]

ep_1

by 섭이씨 Jan 11. 2025

 
                           모비딕 당구장
 
 
  베개를 끌어안으며 설핏 잠이 깨었다. 꿈속에서 아주 달콤한 키스를 나누었는데 후루룩 거리며 빨아 대었던 것이 입술 같기도 하고 여자의 성기 같기도 했다. 잠이 깰수록 꿈의 잔상들이 움켜쥔 물처럼 새어 나간다. 아쉽다. 왜 꿈은 금세 잊히는 것인지, 이렇게 자극적인 꿈은 해마 같은데 넣어두고 필요할 때 떠올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잠을 청하려 다시 눈을 감는다. 감은 눈꺼풀 안쪽은 온통 짙은 먹색이다. 먹색 배경 속에 멀리 불빛이 하나 보인다. 그것이 점점 크게 보이더니 민들레 홀씨처럼 터져서 자잘한 불꽃이 되어 내린다. 간밤의 빛의 잔영들이 아직 남았을 리도 없는데 눈 안에서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아무래도 다시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주방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린다.


  “병수야, 언제 왔더노?”


아침이 되었나 보다. 출근 준비하시는 엄마 목소리가 먼저 들리고 곧이어 내 방문이 빼꼼 열린다. 딱히 대꾸할 말도 없고 이불을 한번 뒤척거린다.
  ‘엄마도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시는 거지 뭐.’


  “엄마 나간다. 동탯국하고 밥무라.”
  “...에에....”
  
  엄마는 아파트 청소 일을 하러 다니신다. 그 일을 하신 지 10년은 넘은 것 같다. 얼마 전에 결혼한 친구 현석이가 새로 지은 주상복합아파트에 전세로 신혼집을 얻었다.

그 집은 당시만 해도 낙동강 이남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였다. 지붕에 헬기 앉는 곳이 둥글고 커서 나는 그 아파트를 UFO 같다고 했다. 여하튼, 공교롭게도 엄마가 다니는 용역에서 그쪽 일을 줬다. 그런 바람에 엄마랑 석이가 간혹 그 아파트에서 마주치는데, 석이는 제가 먼저 꾸벅 인사를 하기야 할 테지만 입주자한테 버릇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는 작업복 입은 친구 엄마 대면하기가 불편할 것이고, 엄마도 어릴 때부터 봐왔던 아들 친구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으실 것이다.
오늘 석이를 봤다는 엄마 말씀을 듣는 날이면, ‘그 새끼는 와 거기 처 사노, 지가 우주인이가....’ 하고 괜스레 입안에 욕이 고이기도 했다.


  이불을 감고 뒹굴뒹굴하고 있으니, 위쪽에서 화장실 물소리, 문밖으로 계단을 뛰어내리는 소리, 베란다 밖에서도 학교로, 일터로 움직이는 하루의 시동 소리가 들려온다. 나도 그렇게 시동을 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낡았지만 시선만큼은 완벽히 차단하는 콘크리트 벽에 이런 내 모습을 숨길 수 있어서 참 다행이기도 하다. 1층에 있는 대형 은행처럼 유리로 지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지방대 문과 출신으로 B 정도의 평균 학점을 가진 내가 취업의 벽을 넘는 것은 5미터 폭의 냇가를 단번에 뛰어넘는 것과 비슷했다. 벼룩신문에 취업한 잘생긴 동기가 하나 있을 뿐 임용고시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일부를 빼고는 동기들은 주로 학원 강사나 과외를 했다. 나도 9급 공무원 학원에 등록한 첫 달, 지겹고 재미없어서 사흘을 나가고 그만두고는 유명 입시학원에 들어가 얼마간 일을 했다.


  원장은 자녀의 손을 끌고 들어오는 학부모에게 친절하고 집요했다. 우리 학원은 자녀의 밝은 미래를 위한 디딤판이요 의지할 버팀목이며, 거기다가 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학원생을 가족이나 조카같이 생각하여 지식뿐만 아니라 인성까지 드높이는 근래에 보기 드물 뿐 아니라 인근에 두 개 있을 수 없는 유일한 지덕의 조화를 이룬 학원이라는 대사를, 몇 날 동안 같은 부분을 연습한 아나운서처럼 매끄럽고 군더더기 없이 처리했다.
그 대사에 탄복한 학부모들은 이런 훌륭한 학원의 마감이 자기 앞에서 끊기게 될까. 조바심을 내며 수강 신청을 하곤 하였다.
  

  한번은 회식하는데, 술이 얼큰해진 원장이 선생님들을 보고 내가 너희들을 먹여 살리니 나한테 충성을 다 바쳐야 한다고 했다. 나한테 잘 보이는 선생은 돈도 많이 벌고 잘 나가게 될 것이고, 밉보이면 모가지일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제대로 선생질을 못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선생님들은 자주 들었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오히려 밝은 표정을 해 보이며 원장님을 위하여, SJ학원을 위하여! 라며 건배들을 해 대었다. 내 옆에 앉은 여자 영어 선생님은 '원장님을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어요~'

라고 외치며 8부로 찰랑거리는 자신의 소주잔을 제 정수리에 들이부었다. 내 차례가 오면 대접에 짬뽕한 술이라도 가득 채워 ‘충성!!’ 하면서 들이마셔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분위기로 봐서 아마 그 정도는 진부한 재탕일 것 같았다.


  회식이 있은 며칠 후에 나는 집안일을 핑계로 학원을 그만두었다.
졸업장으로 포장된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강단에 서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사교육의 한 축이 되는 것이 싫어서였다. 공교육을 무너뜨리고 서민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고액과외로 위화감을 조성하고 균형적이고 전인적인 교육에 저해되며 또한 비대한 학원 재벌의 배를 채우고.        뭐, 사교육의 폐해야 이것이 다이겠느냐! 여하튼 나만은 그것에 동참하지 않는 것으로, 까마귀 노는 곳에 가지 않는 것으로, 백로로서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






이미지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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