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_6
그날 이후로 그 전라도 손님은 일주일 새에 서너 번을 더 들렸다. 두호랑 말할 때 그 손님을 라도형이라 불렀다.
손님이 없는 저녁에는 시작 버튼도 누르지 않고 치킨 내기 당구를 쳤다. 누가 이기든 당구비라 하며 라도형이 치킨값을 지불했다. 라도형은 당구장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 공사장에 철거 일을 하청 받아 공사를 하고 있는 업체의 부장이라고 했다.
“송사장 나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본께 사람 보는 눈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송사장은 사람이 마이 붙을 상이랑께”
아.... 외롭고 서글픈 당구장을 경영하는 중인데 이렇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오히려 내가 객지서 고향 사람 만난 것처럼 반갑고 고마웠다.
외로운 세 명은 당구장에서 자정이 넘도록 술잔을 나누곤 했다.
일요일 정오쯤 두호와 먼저 만나 가게 앞에 다다르니 라도형이 나와 있다. 오늘은 일이 없는 날이라 오전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당구장 문을 열어주니 ‘야스리’를 들고 큐대 손질을 시작한다. 하나하나 큐대를 손보고 나더니 이번엔 화장실 청소가 시원찮다고 약국에서 염산을 한 통 사 가지고 온다.
양동이에 물을 담고 염산을 섞어 넣으니 흰 연기가 무럭무럭 난다. 손수건으로 마스크를 한 다음 염산물로 소변기며 대변기의 묵은 때를 씻어낸다.
“아효.... 해임 고맙구로 뭔 일로 이래 해 주예...”
“어따 동생들 착하기만 해 갖고 당구장 하겠는가. 큰돈 드는 것도 아니고 이래라도 손 봐놔야 손님이 오도 욕을 덜 하재.”
거봐라. 전라도 사람 참 좋지. 손바닥만 한 나라에서 사분오열 지역감정이 생기는 건 오로지 정치인의 잇속 챙기기 때문이리라.
“행님. 혹시 전에 당구장 하신 적 있습니꺼?”
“허허. 나가 소시쩍에 고향에서 당구장을 쬐매 했었는디 이름이 JB당구장이었지. JB가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JB. 머시냐. 정 의 J, 보 의 B. 정보. 컴퓨터 잘하는 똑똑한 내 친구가 지어줬지. 우째 겁나 멋지지 않는가. 송사장.”
두호랑 눈이 마주쳤다. ‘이거 웃자고 하는 소리 맞겠재?’
난 라도형이 정말 좋았다. 곱슬머리에 넙데데한 것이 호남의 평야같이 생긴.
적막이 오늘따라 잠시 일어설 새도 없이 종일 드러누워 있는 당구장에서 두호랑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시켜놓고 앉았는데 계단에서 다다닥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김치찌개 한 개에 공깃밥 한 개 추가를 팔게 되어서 너무 좋아 분식집 주인이 뛰어 올라올 리는 없을 테고, 당구 칠 놈인지 화장실 급해서 오는 놈인지 잠시 분간하고 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놈은 가끔 와서 죽치는 고삐리 준석이다.
건물주가 술 취한 손님이 날아차기로 건물 계단에 있는 화재경보기를 깨 놓았다는 데 범인이 아마도 저놈이 아닐까 싶다. 당구 치다가도 툭하면 붕붕 뛰며 발차기로 천장 형광등을 겨냥해 대는 꼴이.
마침 뒤이어 라도형도 문을 열고 들어선다.
“헥헥.... 행님.”
“오 그래 준석아. 행님도 오셨어예?”
준석이는 나보고 형님이라고 한다. 준석이가 라도형을 한번 힐끗 보더니 주뼛거리며 말을 꺼낸다.
“저기.... 행님 십만 원만 빌려주이소.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좀 필요한데 내일 갖다 드릴께예.”
“어? 어! 다친 데는 없나....”
지갑에 마침 십만 원 정도가 있다. 눈치도 없구로!
“예. 행님. 지금 급한데예.”
준식이 녀석은 정말 맡긴 돈 달라는 것 같다. 지갑이 있는 뒷주머니로 손이 가고 있는데,
“어요. 학생아. 내 여 사장아저씨 형님인데 니가 여서 돈 빌리 달라모 안되지 않것냐? 너네 집에 가서 말혀야지”
정의의 라도형이 소매를 걷으며 나선다. 장미 문신이 슬쩍 보인다.
“아이 급해가꼬예”
“그래도 그라는기 아니지. 여도 장사가 안 돼서 돈 없으니께 얼른 집에 가 보거라”
준식이가 나를 본다. 나는 준식이 눈길을 피해 라도형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는 턱을 실실 만졌다. 옆얼굴이 한참 따갑더니만 준식이가 별 소득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송사장. 그거 주모 저 아 들이 돌리 줄 것 같어? 안 준다. 손님 잃고 돈 잃고 하는 거씨여”
“그지예? 해임 덕분에 잘 넘어갔네예.”
공깃밥을 또 추가시키기는 미안해서 김치찌개 한 개를 더 주문해서는 셋이서 밥을 먹었다. 시계가 오후 5시를 가리킨다.
“근데 행님 오늘은 일찍 나오셨네예”
“아. 그게 말여. 건설사 소장놈이 철거비를 제대로 안 치주서 돈 주모 일할 꺼라고 으름장을 놓고 왔재. 그나저나 동생. 안 그래도 나가 할 말이 쪼까 있는데... 해도 되겠는가 모르것네.”
“뭔데예 행님.”
“아이참 이거. 며칠만 있으모 나오는데... 나 돈 쪼까 해줄 수 있을란가?”
“예?”
“고향에 엄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전갈이 와서 급히 좀 내려가 봐야 쓰겠는디 병원비가 좀 필요하다 하네. 내사 철거 공사한다고 가진 돈을 다 써부려가지고.... 여가 객지고 해서 바로 말할 데도 엄꼬.... 며칠만 쓰모 되는디 우째 동상이 될란가 모르겠네. 이거야 원 나가 얼굴 꺼슬리서 참말로....”
라도형의 일에 스스로를 옭아매는 말을 반사적으로 해 버린다. 생각 없이.
“아이고 우짜겠노. 얼마나 필요한데예?”
“하이고 동상. 한 이백만 원만 있으모 되재. 나가 딱 5일만 쓰고 갖다 줄텡께. 쪼까 힘들어도 부탁함 해봄세. 못 믿겠으면 나가 가방도 다 여다 놓고 갔다 올텡께. 그라고 저게 공사장 가서 철거 하청회사 용마건설 박부장 찾으모 나가 받을 철거비도 확인할 수 있응께.”
라도형이 들고 온 밤색 여행용 가방이 강아지 새끼처럼 카운터 옆에 묶여있다.
카드 현금 서비스를 받으러 갔다. 라도형이 따라왔다.
신용카드 한 장을 꺼내 한도만큼 백만 원 정도를 서비스받고 주저하고 있으니. 라도형이 내 지갑에 손을 넣을 듯이 하며 다른 카드를 또 넣어보라고 한다. 이 상황이 슬로비디오 같다. 현금인출기가 고장이라도 났으면, 카드가 한도를 넘어서 더 돈이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인출기는 내 마음도 모르고 이백만 원을 채워서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