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드즈모임 Oct 30. 2023

나의 도시 이야기

장소 상실과 관련된 개념들을 중심으로 살펴본 원주 아카데미극장의 의미

  2018년 겨울, 집 근처를 정처 없이 걸었다. 발이 닿지 않은 길이 없도록 거의 모든 골목에 발자국을 새기고 눈도장을 찍었다. 언젠가는 이곳에서 탈출해 서울로 가야 한다는 가족과 사회의 열망 혹은 길들임에서 벗어나 이 도시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정작 내가 사는 동네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한 일이었다. 매일 지나던 똑같은 길이었지만 왠지 정감이 가고 따스함이 느껴지는 풍경을 발견할 때면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그 장면을 포착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사진을 찍는 주기가 짧아지고 걸음이 느려지고 자그마한 것들에 눈을 맞출 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곳은 풍경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삶 그 자체구나.


  낡은 잿빛 담벼락은 하교 후 친구들과 시내에 놀러 가는 지름길이었고, 방송국 앞 산책로는 친구들과의 놀이터이자 엄마와 자주 걷던 운동 코스였다. 장소를 지날 때마다 그곳에 새겨진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조각조각 분절되어 있던, 어떤 것들은 잊고 지내기도 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다시 그곳을 감각하면서 걷는 현재의 나와 만나 장소의 시간이 연결되는 것은 물론 오래된 익숙함이 가져다주는 평온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내게 꽤 충격적으로 남아 도시에 대한 애착과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동시에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를 전유하는 주체로서의 위치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발터 벤야민이 말한 도시의 산책자(flaneur)는 위와 같이 도시 공간을 헤매다가 도시의 경관이나 산재한 하찮은 사물들에서 예기치 않게 과거 기억과 만나고 잊힌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다. 도시는 이러한 산책자의 경험이 가능케 할 수 있는 흔적들이 쌓여 있는 저장고이며, 잊힌 기억을 상기시키는 무대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기억과 연결될 수 있는 흔적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도시에 작동하고 있는 수많은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낡은 것은 새것으로 교체되는 무수한 과정을 거치면서 과거의 기억은 흩어지고 끝내 잊히고 만다. 


  실존주의적 지리학자 렐프(2005)에 의하면,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장소와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무장소성이라는 보편적 조건에 처해 있다. 이러한 무장소성이 유발되는 과정은 다양한데, 장소의 정체성을 약화해서 결국 장소들이 서로 비슷하게 느껴지고 경험 가능성도 똑같이 단조롭게 된다. 인류학자 마이크 오제(2017) 역시 초근대성의 사회에서는 과거 시간 속에서 이루어졌던 경험과 사회적 관계와의 단절로 역사성이 상실된 채 현재의 시간만이 중시되는 공간들이 만연해 있으며, 이러한 공간에서 개인은 원자화되면서 그 특이성은 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에 저항하여 과거의 장소를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 있는데,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장소가 바로 원주 아카데미극장이다. 1963년에 개관하여 2006년에 문을 닫은 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극장 주인이 바뀌면서 철거될 위기에 처했고, 시민들은 원주에 마지막 남은 단관극장을 보존하기 위해 2016년부터 자발적인 민관협력 보존 활동을 펼쳤다. 수년간의 노력이 쌓여갈 무렵 2021년 <아카데미 구하기>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모금 활동이 약 3주 만에 1억 원을 넘어섰고, 이는 그동안 소극적이던 행정을 움직이게 해 결국 2022년 1월 원주시에서 극장을 매입하기에 이르렀다.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국내에서 화재나 변형 없이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이라는 점과 국내 영화사에서 의미 있는 사료가 많이 남아있다는 점 등 다양한 방면에서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나 가장 중요한 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지키고자 했던 장소라는 점이다. 어렸을 적 가족 또는 친구, 연인과 머물렀던 일상의 공간이었기에 구석구석 시민들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있으며, 그곳에서 오랜 세월을 버텨낸 장비와 소품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시간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어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상상 혹은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현재의 시간만이 존재하는 멈춰진 공간이 아니라 장소와 사람이 함께 나이 들어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성과 장소성이 교차하는 곳이다.



  그러나 2022년 7월, 새롭게 들어선 민선 8기는 전임 시장이 추진해 온 주요 사업을 과감하게 구조조정 할 것을 요청하며 그중 하나로 아카데미극장 복원 중단을 권고했다. 원주시는 충분한 숙의 과정을 거쳐 시민, 상인회, 전문가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활용 방안을 결정하겠다고 밝혔지만 8개월 후 일방적인 극장 철거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시민들은 <아카데미의 친구들>이라는 모임을 결성해 극장을 보존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고, 이러한 활동은 전국적으로 이슈가 되어 많은 지지와 연대를 끌어내면서 어느새 문화예술계의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애그뉴(1987)에 의하면 장소는 기본적으로 위치(site), 로케일(locale, 현장) 그리고 장소감 3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그중에서도 로케일로서의 장소는 물리적 환경 및 사회적 구조를 배경으로 행위자들의 실천이 이루어지고 사회적 상호관계가 구성되는 무대(setting)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어떤 활동이나 사건이 전개되는 곳이라기보다 자연적, 사회적 힘으로 조건들(제약 조건들뿐 아니라 가능성의 조건들)이 작동하면서, 그 힘이 행위자들의 실천과 결합하여 즉각적으로 실현되는 장소이다. 이러한 개념을 적용했을 때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로케일을 활성화하려는 시민들의 실천적 행위와 이를 지배하려고 하는 구조적 힘(자본과 권력)과의 충돌이 일어나는 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2023년 10월, 원주시는 끝내 극장 철거에 돌입했다. 극장을 허물고 나면 아마도 그 자리에는 오늘날 대도시를 구성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장소가 세워질 것이다. 이는 마이크 오제(2017)가 이야기한 ‘비장소(non-place)’ 즉 특정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관계의 부재, 정체성의 부재, 역사성의 부재 등으로 인해 인간적인 장소가 될 수 없는 공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원주시가 부순 것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실존 철학의 대표 사상가인 마틴 하이데거가 포착한 장소 상실에 관한 논의의 연장선에서, 시민들이 장소에의 ‘뿌리내림’을 통해 느꼈던 삶의 안전감을 무너뜨리고 존재 근원을 상실하게 만드는 일이다. 과연 ‘뿌리뽑힘’을 당한 시민들은 이 도시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장소로부터 끊임없이 분리되고 배제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나’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참고자료

최병두. 2023.「‘장소 상실’에서 ‘장소 소외’로」.《공간과 사회》, 33(1) 

김수영. 2023.「[기획] 극장을 지켜라, 철거 발표된 원주 아카데미극장 그 이후」.《씨네 21》, No.1403



노주비



작가의 이전글 원주 시내버스 희망편, ‘준공영제’가 이끌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