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눌레 재료
추진력 50g, 통찰력 50g, 애정 240g, 솔직함 500g, 사랑스러움(영화 속 여주인공 같은 30g, 그렇지 않아도 좋은 40g), 바닐라빈 1개, 버터 20g, 럼 20g
네 첫인상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유명하다는 빵집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잡아끄는 너. 누구라도 홀린 듯 집어 들 수밖에 없는 너. 꽃을 닮은 외형에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너는 매력적이었다. 너와 이야기를 하며 봉투 속에 든 플라스틱 칼을 꺼냈다. 네 위에 올려놓았다. 단단한 너는 잘리지 않았고, 빵집에서 건네준 연약한 플라스틱 칼로는 너의 단면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는 말했다. “빵칼이 필요할 것 같은데.” 빵의 부드러움만을 맛보았던 나에게 너의 바삭한 단면은 새로움이었다. 맛있는 시간. 단단한 표면을 지나면 부드럽고 촉촉한 속이 나온다. 강한 사람, 그리고 여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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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븐 예열
200도로 1시간 정도 오븐을 충분히 예열한다.
너와 카페에 들러 음료를 한 잔씩 샀다. 너는 이천 쌀 프라푸치노, 나는 캐모마일을 골랐던 것 같다. 진동벨이 울리고 음료를 받은 후 카페를 나선다. 너와 광화문을 걷는다. 문득 운동화 끈이 걸음마다 걸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개를 숙이고 운동화 끈을 잡는 순간,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뜨거운 차가 쏟아진다. 손에 감각이 사라진다. 약한 화상을 입어 부어가는 손이 갈 곳을 잃은 채 종이컵을 꼭 쥔다. 짧은 순간 엉뚱한 생각이 끼어든다. 캐모마일이 숙면에 좋다는데 이렇게 뜨거워서야 불면을 이길 수 있을까? 멍하니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욱신거리는 손을 바라만 본다. 운동화 끈은 여전히 풀려있고, 종이컵에서는 계속해서 뜨거운 찻물이 흘러내린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중에, 네가 알 수 없는 표정과 함께 컵을 빼앗아 들었다.
“들어달라고 하면 되지 왜 가만히 있어?”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왜 들어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
세상에는 수많은 ‘나’가 존재한다. 각자의 ‘나’는 하나의 몸 안에 담겨 고유하고 독특한 삶을 살아간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는 내 몸에 담긴 나밖에 없고, 내가 평생을 살아도 알 수 있는 ‘나’ 역시 나밖에 없다. 그러니 다른 ‘나’는 내 부탁을 들어줄 의무가 없고, 부탁을 하는 일조차 다른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관계라는 게 이런 걸까? 서로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며 물들여가는 것. 네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는 나에게 자유이자 해방이었다.
사람들이 말했다. “너 처음에 낯 많이 가렸잖아. 항상 구석에서 책 읽고 그랬는데.” 나는 대답했다. “맞아, 나 낯 진짜 많이 가렸는데.” 그 말을 들은 너는 빤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지금도 낯 가리잖아.”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사실 그랬다. 단지 과거보다 낯을 덜 가릴 뿐 사람들에게 완전히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너는 가끔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고, 네 말은 실을 꿴 바늘 같아서 네가 가는 길마다 나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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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틀 작업
1. 동틀을 오븐 예열할 때 데워지도록 같이 예열한다.
2. 관계는 100도까지 예열한다.
3. 데워진 동틀을 꺼내고 동틀에 관계를 넣어 다른 동틀로 이동시키며 코팅을 해준다. 코팅되면서 관계의 양이 줄어드니 보충해주며 남은 동틀도 동일하게 작업해준다.
꿈에서 네가 나와 “네 모자는 잘 지내?”라고 물었다. 나는 “분모자.”라고 대답했다. 이상한 꿈. 아마도 네가 보고 싶은 거라고 생각하며 눈을 뜨자마자 기록을 남겼다.
나는 사람이 힘들었다. 연락이 힘들고, 누군가 힘들어 보이는 것이 힘들고, 대화를 나누는 것과 표정을 읽어내려 애쓰는 것, 의미 하나하나를 생각하며 행동하는 일이 힘들었다. 코로나를 핑계 삼아 내면의 깊숙한 방 안으로 도피했다. 모든 사람들을 과거에 남겨두고 오고 싶었다. 나의 현재에 아무도 남지 않았으면 했고, 사람들의 현재에 내가 남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보는 것들에 대해 무던히 넘어갈 수 없다면 나를 괴롭히는 예민으로부터 모든 것을 떼어놓고 싶었다. 작은 방 한 칸에서 사랑하고 미워하느라 이기적이게도 소중한 사람들을 방치했다. 그때 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기분이었을까. 항상 덤덤한 듯 보였지만 정말로 그랬을까. 그때 하지 못한 생각을, 그때 하지 못한 반성을, 지금에서야 한다. 너는 묵묵히 기다려주었고, 그 기다림이 있어 나는 동굴에서 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생일이 하루 차이였다. 하루라는 시간의 벽을 허물고 같은 날 생일을 보내기로 했다. 네가 사는 곳에 내가 도착하자마자 ‘너와 나’는 ‘우리’가 되었다. 우리는 칼국수를 만들어 먹고, 미리 예약해둔 레몬 케이크를 찾아와 남김없이 먹었다. 너는 나에게 속눈썹 펌을 해주겠다고 했다. 가만히 누워서 네 손길에 속눈썹을 맡기고 있자니 어쩐지 이 상황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몇 가지 용액을 바르고 고정시킨 뒤 기다렸다. 한동안 누워서 이야기를 하다 됐다는 말에 거울을 보니, 햇님처럼 바짝 올라간 속눈썹이 보여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빔프로젝터로 벽에 화면을 띄우고 급하게 만든 카나페를 먹으며 함께 영화를 봤다. 배부르고 웃음 가득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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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죽 작업
1. 솔직함을 끓인 후 약 70도 정도까지 식힌다.
2. 식힌 솔직함에 바닐라 빈, 사랑스러움을 넣고 섞는다.
3. 추진력, 통찰력, 애정을 체에 쳐서 부드럽게 걸러낸다.
4. 체에 걸러진 가루에 2번을 3회에 걸쳐 섞어가며 나눠 넣는다.
5. 4번이 완료되면 녹인 버터를 넣고 섞어준 후 럼을 넣고 다시 섞는다.
6. 블랜더로 블랜딩 한 후 하루 정도 냉장으로 숙성시킨다.
너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울적했다. 내게 친구가 있어도 되는 걸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왜 우리 관계는 흔들려야 할까. 이 흔들림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집에 돌아와 복잡한 머릿속을 헤매고 있는데 너에게 연락이 왔다. 대화를 나눴다. 짧게 만나고 이별하는 관계에 익숙해 완벽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하면 그 관계는 그대로 끝나버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너는 말했다. “내 사람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 만약 실망한다면 그건 내 문제야. 나는 내 사람을 절대 먼저 놓지 않아.” 그 말을 듣고 펑펑 울었다.
나는 울보다. 네 표현을 빌리자면 개울보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사랑한단 말이 떠오른다. 흔들림의 끝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단절, 혹은 더 깊은 관계로의 발전. 크게 싸우고도 그 관계가 깨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사이가 되고 싶다. 여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네가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내 눈치 보고, 너도 내 눈치 보니까, 다 내 눈치 보는 거지.” 내가 물었다. “나 눈치 봐?” 네가 대답했다. “너 눈치 보잖아.” 그리고 잠시 멈췄다 설명을 이어간다. “모든 사람 눈치를 보는 건 아니고 네가 친하다고 생각하거나 잘 보이고 싶은 사람 눈치만.”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네 눈치를 보는 사람이고 싶었다.
너와 이케아에 다녀왔다. 진한 파란색 위에 쓰인 노란 글씨가 예쁘다. 이케아를 둘러보고, 밥을 먹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카페까지 걸으며 산책을 했다. 이때의 공기, 조금 서늘한 듯 초록 필터를 씌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분위기. (너는 공포 영화 같다고 했지만 내가 떠올린 건 리틀 포레스트였어.) 카메라와 휴대폰 기종, 미래에 있을 우리에 대한 짧은 대화들과 운동해야겠다는 푸념까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7. 숙성된 반죽을 체에 거른 후 동틀에 넣는다.
8. 오븐에 200도에서 20분, 180도에서 20분, 160도에서 20분 굽는다.
9. 구움색이 덜 나오면 추가로 더 구워주면 된다.
*최은영, <쇼코의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