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비 Mar 17. 2023

산책과 연애

산책을 좋아한다. 여러 가지 생각 속을 동시에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는 과정. 흘러넘치는 생각을 어찌할 수 없어 나란히 걷는 걸음.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때면 옷장 속에 숨거나 새벽 두 시에 거리로 뛰쳐나가곤 했다. 옷장 속에서 눈을 감고 있자면 많은 것들이 느껴진다.  피부에 닿는 옷의 감촉과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가느다랗고 알록달록한 빛 같은 것들. 한정된 공간 안에 존재하는 끝없는 어둠과 함께 뻗어나가는 생각들. 새벽의 거리는 마치 장난감이나 영화 세트장 같아서 아무리 큰 고민이라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촬영이 끝나고 난 뒤의 빈 공간처럼 머릿속 공간을 텅 비워낸다. 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차도와 신호가 반짝이지 않는 신호는 의미를 상실하고, 의미의 상실은 새로운 의미가 되어 횡단보도 위에 몸을 뉘인다. 나름대로 지켜온 산책의 방식. 일련의 과정에는 타인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다.


처음 너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누군가 네 이름을 말했고, 그 이름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든 건 찰나. 예뻐서 네 존재가 궁금해졌다. 처음 보았을 때 이미 너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만큼.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고. 우연에 우연이 겹쳐 필연이 될 때 또 다른 관계가 시작되곤 하니까. 집을 좋아하는 나답지 않게 한 사람을 납치하기로 결심했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마침 네가 보였다. 나는 너에게 다가가 대뜸 물었다. “오늘 뭐 해?” 너는 오늘 별다른 일이 없다고 했고 나는 말했다. “그럼 나 너 납치해도 돼?” 그렇게 납치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너와 카페에 가서 대화를 하고, 저녁 식사를 하고, 즐거운 하루였다. 대화를 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너는 살면서 한 번도 행복해본 적이 없다고. 나는 ‘내가 행복하니까 내 행복 너한테 나눠줄게.’ 너는 어떻게 나눠줄 건지 물어봤고,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사람은 주변 사람을 닮아가니까 나랑 같이 있다 보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 헤어질 때 너는 그랬다. ”이런 납치라면 얼마든지 납치당해도 좋아. 다음에는 내가 사줄게.”


체육대회가 있던 날 나는 고민했다. 특정 종목에 참가하지 않는데 가는 게 의미가 있을지 몰라서. 마침 여동생이 근처에 간다고 했고, 나는 이끌리듯 체육대회 장소에 찾아갔다. 막상 가서 어색하게 앉아 있게 되면 어떻게 하지 생각했는데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 네가 있었다. 네가 옆에서 말을 걸어줘서 괜찮았다. 어색하지도, 못 올 곳에 온 것 같지도 않았다. 너는 장난처럼 ”나 같은 사람 있으니까 좋지? “라고 했고, 나는 웃었다.  ”그러게, 너 같은 사람 있으니까 좋다. “ 너는 말했다. ”이렇게 반응해 주는 사람 있으니까 좋네. “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왜인지 모를 아쉬움에 잠시 서 있었는데, 네가 마스크를 벗고 입모양으로 무언가 말했다. 잘 알아듣지 못한 나는 다시 물어봤지만 너는 알려주지 않으려 했고, 계속 물어본 후에야 ”카페 갈래? “라는 말을 뱉었다. 옆에 있던 희가 카페에 가냐고 물었다. 나는 희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는 셋이서 카페에 갔다. 처음 보는 예쁜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희가 먼저 일어났다. 슬슬 일어나는 분위기인가 싶어 짐을 챙기려는데 네가 말했다. ”우리는 좀 더 이야기하다 갈게.” 희는 할 일이 있다며 돌아갔고, 나는 너와 카페에 앉아있다가  9시쯤 출발했다.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네 기억력이 좋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문득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속 기억에 혼자 남아있는 건 어떤 기분일까.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다음 날 우리는 네시 반까지 sns로 연락을 이어갔다.


월요일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너는 다음에 네가 사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나는 우리 집 앞에 있는 천이 삼천천이라는 걸 네가 알려줘서 알았다. 오랜 시간을 걸었다. 걷는 시간만큼 오래 이야기했다. 너는 유독 나에게 질문을 많이 했는데 주로 연애에 관한 질문이었고, 이상형에 관한 부분을 자주 물었다. 한동안 이상형이 없었지만 이상형에 관한 질문을 자주 받게 된 후부터는 조금씩 생각해 보았다. 나는 말했다. ”내가 이상한 짓 할 때 옆에서 같이 이상한 짓 해줄 수 있는 사람. “ 너는 그런 사람이 되어 보겠다며 나와 비를 맞았다. 양말이 젖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데도.


다음 만남에 우리는 서전주 중학교 정류장에서 만나 165번을 타고 혁신도시에서 내렸다. 너는 연신 ”차가 있었다면…“ 하고 말했지만, 나는 버스 타는 걸 좋아해 마냥 좋기만 했다. 저녁을 먹고 카페에 갔다. 너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내 행복을 나눠줄게.’라고 말했던 그 순간부터 네가 신경 쓰였어. 행복을 나눠주겠다는 그 말, 믿어볼게. 그러니까 책임져. “ 하지만 나는 상상해보지 않은 이야기였고, 친구로 지내줬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날도 오래 걸었다. 빛 길을 따라 한 바퀴 돌고 버스에 몸을 실은 채 집에 돌아왔다. 나는 집에 돌아와 일기를 썼다. ‘그래도 오늘 용기 있더라.’


어쩌면 그때부터였을까, 혼란스럽기 시작했던 건. 나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 표현해 주는 게 고맙다. 너는 내 모습이 좋다고 해줬다. 생각해 주고, 말 예쁘게 하고, 생각을 정말 깊게 하는 행동들이 보인다고.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냐고. 정말 주변에서 사랑을 많이 받아온 것 같다고. 상상을 못 할 정도로 말이든 행동이든 사랑을 많이 받아온 게 보인다고. 웬만해서는 밀어내고 어찌어찌 지내는 거 잘하는데 이번에는 그게 힘들다고.‘ 그렇게 아낌없이 표현해 주는 게 참 고맙다. 너는 몰랐겠지만, 나는 적극적인 사람에게 약한 면이 있어 쉽게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그날 너는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고, 나는 그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네가 아픈 게 속상했다. 너는 “같이 갈래?”라고 물었고,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 갔던 카페에 갔다. 가을바람은 선선하고, 마음은 이상하게 붕 뜨고, 같이 걸으면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계절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함께 걸었다. 문득 네 소맷자락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섣부른 감정으로 너에게 다가가는 건 상처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눈을 뜨니 쌀쌀한 공기가 느껴졌다. 8시 16분. 고민을 했다. 너는 sns 게시물에 내가 찍어준 사진을 올렸다. 내 고민을 눈치챘는지 엄마가 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엄마는 말했다. ”사랑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너는 설레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랑은 오래 참음이고 상대를 인내하는 과정이야. 지금이 어떻든 나중에 되면 더 좋아질 수도 있잖아? “ 그 말을 듣고 결심했다. 너와 함께 있으면 편하고, 안정감이 있었다. 10시 반, 우리는 유치원에서 만나 근처 놀이터에 갔다. 나는 말했다.


”달이 예쁘다. “


네가 태어난 날은 12월 6일, 내가 태어난 날은 12월 9일. 우리는 모든 게 정반대인 이란성쌍둥이다. 어쩌면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너와 나의 언어가 달라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으니.  매일 자기 전에 기도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너를 좋아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매일매일 그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점점 네가 더 좋아졌기 때문에. 이제 네 이름은 일기장의 모든 줄에 등장하고, 내 하루는 너로 시작해서 너로 끝난다. 너는 자꾸만 헬륨 풍선처럼 허공으로 떠오르는 나를 지상과 가까워지도록 단단하게 끌어당긴다. 그런 네가 좋고, 그렇지 않은 네가 좋다.


하얀 계절이 찾아왔다. 나는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곳을 골라 걸었고, 너는 그런 나에게 말했다. ”너는 길을 만들어. 나는 네가 만든 길을 따라갈게. “ 너는 현실적이고 나는 이상적이다. 세계에 순응하는 것과 세계를 거스르는 것. 너는 둘 다 해본 결과 전자가 덜 힘든 것 같아서 그 길을 택했다고 한다. 늘 세상과 다투기만 했던 나는 너의 존재로 인해 세상과 화해한다. 길을 걷다가 빙판길 위에서 넘어졌다. 나를 잡고 있던 너도 넘어졌다. 혼자 넘어지면 서럽지만 같이 넘어지면 웃기다. 우리는 배가 아플 때까지 웃었다. 너는 말했다. ”나는 너한테 걷는 법을 배워. 나는 항상 뛰기만 했거든. “ 나는 조금 걸음을 빨리하고 너는 조금 느리게 걸으면서 속도를 맞추는 것, 요즘은 그게 산책인 것 같다. 산책과 연애. 온 세상이 고요한 겨울.


봄에도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까눌레 레시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