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들이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져 터지는 동안, 물고기는 수영장에서 익사했다.
아스팔트 바닥과 건물의 색, 나무의 초록이 짙어지던 날. 비는 하늘을 회색으로 물들이며 천천히 내린다. 비는 습하고 더운 공기를 타고 어느 작은 도시의 수영장에 이르렀다. 수영장 안에는 한 마리 아름다운 물고기가 주위를 돌며 헤엄치고 있다. 물고기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수영장 밖에는 바다라는 곳이 있다고.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 너머의 세계와 한없이 깊어지는 심해의 세계. 지도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그곳에는 아틀란티스라는 오래된 꿈의 도시가 존재한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물고기는 익사해야만 아틀란티스에 도달할 수 있단다.”
아름다운 물고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흐르고, 아름다운 물고기는 혼자 남았다. 혼자라는 감각. 지독한 외로움. 누구에게도 닿을 수 없다는 절망. 아틀란티스에 간다면 이런 감정들이 사라질까. 매일 자신의 꼬리지느러미를 물어뜯으며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헤엄을 치며 기도한다. 내일은 눈을 뜰 수 없기를.
발밑에서 넘실거리는 우울은 싸한 락스 냄새가 난다.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푸른 물과 표면의 빛. 바닥 타일의 무늬. 굴절과 왜곡. 수영장에서는 모든 것이 왜곡된다. 굴절하는 신체는 제 형태를 잃고 흐물흐물해진다. 머리, 지느러미, 몸, 꼬리, 누군가 우연을 이용해 그려낸 그림처럼 철저하게 분리된다.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소리를 지르지만,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닌 침묵. 부레에 물이 들어찬다. 위로 올라가는 수많은 언어의 방울이 점차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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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허공에 떠다니는 비눗방울이 하나둘 바닥에 떨어져 소리 없이 사라진다. 온은 미처 마르지 않은 눈물을 그대로 둔 채 멍하니 꿈에 잠겨 있었다. 이상한 꿈이었다. 물고기가 수영장에서 익사한다니.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 한참을 헤맨다. 방 안은 고요했고 창으로 햇빛 한 줄기가 들어온다. 나비 같은 커튼이 가볍게 흔들리며 신비로운 빛을 반사한다. 머릿속에 여전히 어스름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애써 꿈을 몰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은 병원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한에게 와있는 부재중 전화 한 통과 문자 메시지 두 통.
- 오늘 병원 가는 날이지?
- 데려다줄게.
12시 15분. 온은 시계를 보고 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한의 목소리가 들린다. 높낮이가 없이 일정하고 차분한 음성. 한이 묻는다.
“일어났어?”
“응.”
“지금 너희 집 앞이야. 나와.”
급한 대로 보이는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선다. 구겨진 신발 뒤축을 모른 척하며. 집 앞으로 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익숙한 번호판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조수석에 몸을 구겨 넣는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비눗방울이 차 안을 떠다닌다. 온은 톡톡 터지며 시트에 남은 비눗방울의 자국을 본다. 한이 창문을 열고 비눗방울을 밖으로 몰아낸다. 온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한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내뱉는다.
“미안해.”
한은 한숨을 내쉰다.
“괜찮아.”
차가 출발한다. 온은 가벼운 멀미를 느끼며 눈을 감는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 사이로 어색함이 끼어든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온은 숨 막히는 정적을 견디며 상상의 세계로 도피한다. 수영장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 술래는 눈을 감고 열을 센 후에 아이들을 찾아다니고,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자신의 위치를 알린다. 인간이 가장 많이 의지한다는 시각이 배제되고 암흑이 찾아오면, 그 외의 감각이 뾰족해진다. 필연적인 굴절과 왜곡 속에서 찾아다니는 타인의 존재, 타인의 목소리. 병원에 도착했는지 한이 가볍게 온을 흔들고, 온은 현실로 돌아온다. 고마워. 들릴 듯 말 듯 작게 말하고 병원으로 들어간다.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린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조용하고 따분한 공간. 간간이 들리는 간호사의 단조로운 목소리와 이동식 침대의 바퀴 소리, 다른 사람의 화면 너머로 흘러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의 웃음소리, 그 모든 소리를 흡수하는 병원의 공기. 졸음이 쏟아진다. 병원에서는 유독 꿈에 가까워진다. 꾸벅꾸벅 졸고 있을 무렵 온의 이름이 불린다.
의사는 컴퓨터 화면을 보며 말한다. 들어오세요. 온은 의사 앞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병원에 온 이유라고 하면 한이 권유했기 때문인데, 온은 자신에게서 별다른 문제를 찾을 수 없었다. 한이 뭐라고 했더라. 뭐가 문제라고 했더라.
“마음이 무겁고 새벽까지 잠들지 못해요.”
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컴퓨터에 무언가를 입력했다. 그리고 간호사를 불러 온을 다른 방으로 이동하게 했다. 방 안에는 기계가 있었다. 온이 일하는 센터에서도 쓰는 감정감지신호측정기. 간호사는 기계를 움직여 온의 머리에 씌우고 버튼 몇 개를 눌러 기계를 조작했다. 기계의 센서 부분이 붉게 변하며 머리 쪽에 열감이 느껴졌다. 기계는 오 분 동안 돌아갔고, 센서의 불이 꺼지자 간호사가 다시 들어와 의사에게로 안내했다. 의사는 말했다.
“감정비만이네요. 해소되지 못한 감정들이 몸 안에 쌓여 있어요. 생각 줄이는 약을 삼일 분 처방해 드릴게요. 약을 먹는 동안에는 음악, 영화, 책, 산책 같이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것들은 금지입니다. 의식적으로 생각을 줄이는 연습을 하세요.”
대답하지 않았다. 해소되지 못한 감정이 몸 안에 쌓인다면 왜 감정을 밖으로 내보내도록 하지 않은 걸까. 생각을 줄여 감정 자체를 몰살하는 것이 과연 좋은 방법일까. 온은 생각했다. 약을 먹은 후에 분명히 나는 이상해지겠지. 그럼 남들처럼 분별 있는 사람이 되어버리겠지. 효율성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겠지. 멍하니 원무과에서 처방전을 받아 들었다. 손에 힘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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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는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이곳저곳에서 전화 응대를 하는 상담원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키보드 위를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따라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매끄럽고 친절한 목소리. 어디를 보나 미소를 띠고 일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온은 자리에 앉아 감정감지신호측정기를 머리에 쓴다. 센서가 켜지며 머리 위에서 기계가 천천히 돌아간다. 상담원들은 민원 상담을 하면서 기쁨, 보람, 성취감, 자신감, 즐거움 등의 긍정적인 감정을 끌어올리고, 센터는 그런 감정에 대한 대가로 월급을 지급한다. 전화벨이 울린다. 온은 헤드셋을 쓰고 마이크에 정해진 멘트를 읊는다.
“안녕하세요, 자존감 본부 요금부서 담당 상담원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에 이사 가는데, 정산하려고요.”
“네, 선생님. 그 부분은 여기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 이사는 언제 가시나요?”
“내일 새벽쯤 가는데 미리 정산을 하고 싶어서요.”
“선생님, 정산 후에는 이사 가시는 곳 자존감 본부에 등록하실 때까지 자존감을 사용하실 수 없는데 괜찮으신가요?”
“아 그래요? 저 오늘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도 해야 하고 저녁에 친구들이랑 약속도 있어서 자존감 사용해야 하는데,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경우라면 내일 떠나실 때 계량기 지침을 확인하신 후, 아침 9시 이후 저희에게 다시 전화 주세요.”
“아니, 내가 까먹을 수도 있는데 그냥 지금 미리 해주시면 안 됩니까?”
“정산은 사용한 만큼의 금액을 고지하는 일이라, 미리 정산할 수가 없어요.”
“그냥 대략 예측해서라도 해주면 안 됩니까?”
“죄송합니다. 선생님. 예상치로는 정산을 할 수 없어요.”
“그러면 내가 이사 가면 그쪽 직원이 직접 검침하러 올 수 없습니까?”
“네, 선생님. 그렇게는 어렵습니다.”
“열등감 부서에서는 직접 검침 나오는데 왜 이렇게는 못하나?”
“저희는 자존감 관리이기 때문에 열등감과는 방식이 달라요.”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 해달라면 해줄 것이지.”
“네?”
온은 갑작스러운 민원인의 반응에 당황했다. 종종 있는 일이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상했다는 사실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온은 애써 미소를 띠고 긍정적인 감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해달라고. 난 고객 아니야? 고객이 해달라고 하는 게 원칙 아니야?”
“선생님, 불편하시겠지만 저희는 규칙상 이렇게 답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너 어디 살아? 내가 지금 찾아간다. 어디 사냐고! 너 몇 살이냐? 내가 이제 육십 넘어가는데 그런 경우라면 이해해줘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렵습니다.”
“네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이 버러지 같은 새끼. 할 줄 아는 게 ‘어렵습니다’ 이 말 뿐이냐? 말만 하지 말고 행동하라고! 내가 자존감을 쓰는 고객인데 그것도 못 해줘?”
민원인은 폭언을 퍼부은 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수화기를 강하게 내리치는 소리가 온의 귀를 울렸다. 온은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떨리는 손끝과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 머리가 어지럽고,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불안정한 호흡으로 폐가 부풀어오를 때마다 온의 주변에 푸른색 풍선이 부풀어 오른다. 점점 커지는 풍선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진다. 상담원들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상담을 진행한다. 효율적인 세계에서는 필요한 일과 필요한 감정이 아니면 버려진다. 필요한 감정만을 끌어내고 그것을 팔아 일상을 살아가는 일. 필요하다는 건 무엇일까. 어떤 것으로 필요와 불필요를 나눌 수 있을까. 온은 그게 못내 이상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했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전화벨이 울린다. 온은 다시 헤드셋을 쓰고 마이크에 정해진 멘트를 읊는다.
“안녕하세요, 자존감 본부 요금부서 담당 상담원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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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에는 한을 만나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십 분 정도 일찍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내일이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고 주위가 시끌벅적했다. 허공에 떠다니는 감정의 부피들. 분홍색, 파란색의 알록달록한 솜사탕. 명랑한 음악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모빌, 천장에서 터지는 형형색색의 폭죽. 조용한 온의 생각들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소란. 오늘따라 그런 소란을 견디기 힘들었다. 마침 한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바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온을 발견한 한이 걸어왔다. 한이 물었다.
“주문했어?”
“아니, 아직.”
“미리 주문하지.”
“아, 미안해.”
한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온은 메뉴판을 손으로 짚어 내려갔다. 오만과 편견, 지금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 백 년 동안의 고독,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장미의 이름, 책의 뒷부분은 어디로 갔을까. 질문들로 잠 못 이루는 밤이 길어진다. 달과 6펜스,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 나는 이미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세월의 거품, 재즈는 위험하다. 안나 카레니나,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오늘은 이걸로 해야지. 병원에서 책은 금지라고 했는데. 작게 중얼거리며 한을 본다. 다행히 한은 듣지 못한 듯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주문을 한 뒤, 칵테일 두 잔이 나온다. 짙은 붉은빛의 안나 카레니나 한 잔. 밝은 푸른빛의 1984 한 잔. 나란히 있는 두 권의 책이 불협화음을 낸다. 한은 말없이 칵테일을 마시고, 온은 그 옆에 조용히 앉아 이 불편한 침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생각보다 도수가 높았는지 온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담쟁이가 테이블을 타고 올라와 온을 감싸고 붉은 장미들이 피어난다. 가시에 긁힌 팔에 조그마한 생채기들이 생겨난다. 온은 한을 바라본다. 어떻게 저렇게 고요하고 평온할 수 있을까. 나만 이렇게 출렁이며 흘러넘치는 걸까. 훅 끼치는 열기가 버거워 잠시 자리를 벗어난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본다. 작고, 마르고, 볼품없다. 어쩌면 몸이 작아서 더 감정을 담아내기가 힘든 걸까. 꾸역꾸역 몸 안에 감정을 담아보려다 감정비만이 된 걸까. 다른 사람들이 일상적이고 손쉽게 만들어내는 웃음과 즐거움이 왜 나에게는 어렵기만 할까. 가방을 열고 처방받은 약을 꺼낸다. 눈을 질끈 감고 변기에 약을 털어버린다. 물을 내린다. 소용돌이치며 내려가는 물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온은 화장실을 나선다.
한이 천천히 자리로 돌아오는 온을 바라본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이 움직이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듯 머뭇거린다. 온도 한을 바라본다. 한이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온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한의 입이 열린다.
“온아.”
“응.”
한이 다시 부른다.
“온아.”
“응.”
한이 말한다.
“우리, 헤어질까?”
쿵 내려앉는 심장. 한의 시선이 온의 어깨 위로 무겁게 내려앉는다. 온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감정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올라오는 감정을 계속해서 삼키자 구역질이 올라온다. 온은 감정을 삼켜내는 데 실패했다. 작고 검은 회오리가 생긴다. 한이 회오리를 본다. 한숨을 쉰다. 그리고 온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진정할 때까지. 대화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온아.”
“응.”
“예상은 하고 있었지?”
“응.”
예상했다. 알고 있었다. 한의 태도가 전과 다르다는 건.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다고 해서 충격이 덜한 건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어. 이 관계를 이어갈지 아니면 그만두는 게 나을지.”
“응.”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되짚어가다 보면 너한테 고마운 게 참 많아. 어쩌면 너만큼 나를 생각해 주고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을지도 몰라. 내가 아플 때마다 곁에 있고 나보다 더 내 일을 생각해 줬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 달라. 너는 네 감정에 솔직하고, 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익숙해. 너는 사소한 일에 기뻐하고 슬퍼하는데, 나는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 나는 네가 좋으면서도 어려웠던 것 같아.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왜 너는 슬플까. 왜 너는 우울할까. 왜 너는 감정의 폭이 크고 순간순간 기분이 변할까. 나는 잘 느껴본 적이 없는 부분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어. 어쩌면 나는 너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 온아, 우리 헤어지자.”
“노력해 볼게.”
“뭐?”
“너처럼, 다른 사람들처럼 즐겁고 행복한 감정만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할게.”
작고 검은 회오리는 한의 말을 듣는 동안 점점 커져서 온의 몸보다 거대해졌다. 자존심은 없었다. 한동안 요금을 내지 못해 자존감도 바닥이었다. 온은 매달렸다. 내가 노력할게. 이제 약도 안 버리고 병원도 잘 다니고 상담도 받을게. 밝고 행복한 모습만 보일게. 너를 힘들게 하지 않을게. 그래도 안 될까?
“미안해.”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
온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정신없이 달려 나가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한참을 역사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하철 몇 대를 보내고, 온은 마지막 열차를 탔다.
파란색 시트가 씌워진 지하철 좌석에 앉는다. 일정한 크기로 나누어진 칸 안에 사람들이 앉아있다. 확실한 영역의 구분.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속.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조차 다른 사람의 어깨에 기대지 않기 위해 무거운 고개를 끌어올린다. 사람이 사람에게 기댈 수 없고 사람이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걸까. 이런 걸 함께 산다고 해도 괜찮은 걸까. 온의 몸에 수증기가 맺힌다. 차가운 한기에 수증기가 얼어 작은 얼음이 되고, 얼음은 점점 길어져 고드름이 된다. 옆자리를 침범하는 얼음. 사람들이 온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항상 웃는 사람들은 불행의 냄새를 견디지 못한다. 불행을 배제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순수한 행복. 행복이란 그런 걸까. 그렇다면 나는 행복하고 싶지 않아. 즐겁고 싶지 않아. 옆에 앉은 여성이 온에게 말한다.
“저기 죄송한데, 그렇게 자기감정 티 내는 거 좋게 보이지 않거든요. 사람들 다 불편해하는 거 안 보여요? 좀 숨겨주면 좋을 것 같네요.”
온은 고개를 끄덕인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아낸다. 온은 이곳을 견딜 수 없었다. 행복을 끌어내고 그것을 팔아 일상을 살아가는 일이 견딜 수 없었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온은 다시 일상과 정상의 영역 밖으로 밀려난다.
비가 온다.
-
집에 들어와 침대에 앉는다. 젖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축축한 양말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눕는다. 머리 위에 먹구름이 생긴다. 천장에서 비가 새고, 물을 먹은 먹구름이 점점 커진다. 커지고, 커지고, 커져서 큰비를 내린다. 집이 잠긴다. 침대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온은 입을 열지만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닌 소음. 목에 물이 들어찬다. 침대에 누워 심해를 여행하는 시간. 가라앉아있던 기억과 언어들이 마치 물속에서 흩어지는 바다 밑바닥의 모래처럼 떠오른다. 어지러운 온은 어지러운 감정들 사이에서 뒤척이며 소음의 세계로 빠져든다. 입을 뻐끔거린다. 안녕, 안녕. 반가워, 안녕.
가라앉은 오래된 꿈의 도시 아틀란티스. 이곳 어딘가에는 아틀란티스가 있겠지. 돋아난 지느러미와 꼬리로 헤엄을 치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가미가 생겨난다. 비로소 숨을 쉰다. 세계의 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따라가자 나타난 것은,
수영장.
수영장의 네모난 선을 따라 헤엄친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코가 맵다. 발밑에서 넘실거리는 우울은 싸한 락스 냄새가 난다.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푸른 물과 표면의 빛. 바닥 타일의 무늬. 굴절과 왜곡. 수영장에서는 모든 것이 왜곡된다. 굴절하는 신체는 제 형태를 잃고 흐물흐물해진다. 머리, 지느러미, 몸, 꼬리, 누군가 우연을 이용해 그려낸 그림처럼 철저하게 분리된다.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소리를 지르지만,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닌 침묵. 부레에 물이 들어찬다. 위로 올라가는 수많은 언어의 방울이 점차 흐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