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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광환 Apr 16. 2024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단편소설]

당신이 떠난 그 11월,  카테리니행 8시 기차

작품 노트

2차 대전 중 독일이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완강히 저항했지만 그리스는 끝내 무릎을 꿇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민중은 그렇질 않았지요. 저항의 물결은 그리스 청년들이 몸을 던졌던 파르티잔 활동의 불꽃으로 번져갔습니다.

당시 이름 없는 그리스 시골청년이 있었습니다. 카테리니 너머 올림포스 산에 근거지를 둔 파르티잔 지류부대의 일원이었던.

그가 11월 초, 독일군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며칠 앞둔 그 날, 한 밤중에 고향을 방문해 늙은 아버지의 운명을 지켜봅니다. 다음날, 아버지 시신 앞에 마지막 눈물을 흩뿌리며 그는 바쁘게 카테리니행 기차를 탑니다만, 그 뒤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 있었지요. 약혼자. 고대 스파르타의 왕이자 영웅이었던 레오니다스의 고결한 아내와 같은 그 이름. 고르고스.

그녀의 남자인 청년은 결국 전사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르고스는 그의 묘지에 장미꽃 한 송이를 바치며 눈물짓습니다. 그가 처음 사랑고백을 하며 주었던 바로 그 장미였지요.

이 이야기는 전후, 그리스의 국민작곡가 데오도라키스의 가곡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를 통해 세상에 알려집니다. 한국어로는 세계 최고의 반열인 소프라노 조수미 언니노래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당신이 떠난 그 11월

카테리니행 8시 기차...


이 소설은 필자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그 때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면, 삶이란 죽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죽음 또한 삶과 다르지 않겠지요.


                  https://youtu.be/lYG696u6nHs?si=1Yoa5GOaOqGa5Ktn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

이윽고,

그리스 정부와 군대가 무너지고 대포의 화염도 멈추었다. 아테네의 공공건물과 아고라(시장), 그리고 아크로폴리스까지 파괴되었다. 기원전 480년 그 가을에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가 황금갑옷 번쩍이며 군대를 이끌고 아테네로 밀어닥쳤을 때보다 더 처참했다. 모든 잔해가 화염 걷힌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참혹했다. 적막이 한가롭게 텅 빈 가슴들을 헤집고 공허한 길바닥에 내려앉았다.

독일기갑부대가 보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페르시아 군대처럼 시내로 진입했다. 그들을 맞은 것은 그리스인들의 침묵뿐이었다. 그 땅에서 오래도록 인간과 신들의 터전을 가꾸어왔던 이 헬레네스인들의 눈에 침입자들은 용서받지 못할 이방인들이었다. 신들이 그들을 저주할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는 일이었다. 불과 얼마 전 그리스를 침공했던 이탈리아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이전 그들 땅에 침입하여 영원히 주인행세를 할 것만 같았던 오스만터키제국도 결국 비참하게 몰락하는 걸 그들은 똑바로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염원일 뿐이었다. ‘위대한 헬레네의 자손’이라는 의미를 가진 헬레네스인들에게 이제 정부도 국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다시 찾아온 새로운 압제가 눈앞에서 꿈틀거렸다. 그 와중에서도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 부류들이 있었다. 젊은이들이었다. 각 대학을 중심으로 저항의 물결이 일면서 소리 없이 열렬한 구호가 벽에 나붙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 되었을 때 일찌감치 아테네대학교 인문대학원을 휴학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이아니스 크세노폰은 그 벽보들을 볼 수 없었다. 병 든 늙은 아버지 대신 그는 양떼를 돌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300여 마리의 양떼와, 마케도니아 주 아토스 산악지대에 위치한 마을 앞의 수 에이커 밀밭은 아버지가 평생 이룬 재산이었다. 시국이 어수선한 요즘 같은 때엔 아버지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는 것을 이아니스는 외면하지 않았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가족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 그것은 마케도니아인의 피가 흐르는 이아니스에겐 혈관을 타고 흐르는 율법이었다.


2

먹구름이 아토스 산 능선을 타고 점점 다가왔다. 서둘러 양떼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토스의 바위산으로 구름이 몰려오면 이내 세찬 비가 쏟아질 것이라는 걸 잘 아는 이아니스가 부리나케 말에 올랐다.

빗방울이 굵어지기 직전 양떼를 가축우리에 몰아넣고 장화소리 요란하게 집으로 들어간 이아니스 앞에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이장이었다.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그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다. 스파르타 육군의 100인대장처럼 떡 벌어진 체격에 웬만해서 표정변화가 없는 그였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정다운 미소로 이아니스를 대했다. 그의 투박한 손에 포도주잔이 들려있었다. 완연한 병색의 얼굴을 한 아버지도 친구의 방문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오랜만에 거실로 나와 있었다.

“이아니스, 우리는 방금 중대한 결정을 두 가지 씩이나 했네. 어서 이리 와서 그 이야기를 들어보게.”

이아니스가 탁자 앞 빈 의자에 앉자마자 이장인 라코니우스의 거친 손이 아버지보다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 순간 찻잔을 들고 나오던 여동생 에토니아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쳐갔다.

“라코니우스 딸 고르고스가 데살리니키 대학에서 돌아왔다는구나.”

밭은 가래가 섞인 아버지 음성에 들 뜬 기색이 역력했다. 모처럼 아버지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이장도 빙그레 웃었다. 그는 방금 아버지 이야기를 들은 이아니스 심중에 어떤 파고가 일고 있을지 가늠해보려는 듯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아니스는 중요한 두 가지 결정이라는 것 중 하나를 이제 눈치 챌 수 있었다.

‘당신이 휴학하고 고향엘 내려가신다는 이야기는 제게 슬픈 내용이었어요.

그만큼 당신 아버지의 병이 위중하다는 의미니까요.

하지만 제 가슴엔 왠지 슬픔보다는 벅찬 감정만이 앞서고 있어요.

이번 학기가 끝나면 저 역시 고향으로 달려가 당신을 만날 거예요.

학위를 받으려면 좀 더 공부해야겠지만,

제게 당신을 만나는 일 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요.

당신은 내 모든 것이에요, 이아니스.’

지난 봄 고르고스가 보낸 엽서는 아직도 이아니스 품속에 있었다. 엽서를 읽을 때마다 고르고스 숨결이 배어나왔다. 윤기 나는 갈색머리, 짙고 검은 눈, 펠레폰네소스 라코니아 지방 후예다운 가무스름한 피부. 고르고스 생각만으로도 이아니스 가슴은 뛰었다. 그것을 눈치 챘는지 라코니우스 이장이 서둘러 말했다. 그의 말은 늘 그랬던 것처럼 라케다이몬 땅이었던 정통 라코니아 사람답게 간결했다.

“자네 아버지 데미트리우스와 나는 자네와 내 딸 고르고스를 약혼시키기로 했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우리 마을학교를 맡기기로 또한 결정했네. 게다가 우린 자네와 고르고스 두 사람이 이 결정에 이의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일치를 보았네.”    


3

흰 블라우스와 에메랄드블루 빛 롱스커트에 차양이 넓은 린넨 모자를 쓴 고르고스가 들판 저쪽 아토스 산 기슭 호숫가에 앉아있었다. 푸른 하늘은 그저 고요했고 햇볕은 강렬했다. 지중해성 기후의 쾌청한 자연 선물은 이 지방에서도 듬뿍 받고 있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신이 거주한다고 믿어왔던 아토스 산맥은 세상 어떤 변란에도 불구하고 이 지방을 평화롭게 감싸 안고 있었다.

이아니스가 달리던 말을 멈추었다. 아직은 고르고스가 그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고르고스는 햇볕에 출렁이는 은빛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한 고르고스 자태가 호수 주변 아름다운 풍경을 압도할 뿐만 아니라 강렬한 햇살보다도 더 빛이 날 지경이었다.

'아시겠어요? 제 라틴어 실력은 이제 많이 좋아졌다구요. 당신이 제게 가르친 철자법을 넘어 저는 어쩜 이제 당신보다 실력이 더 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모르겠어요. 그래도 저는 샌님 선생을 왜 이토록 그리워해야 하는지, 라틴어 시간이 왜 이리도 기다려지는지, 우습지 뭐에요.'

디오니소스 축제 때 취한 웃음으로 다가오며 한없이 지껄이던 자유분방한 라코니아 소녀는 간데없었다. 물론 그것은 옛 일이었다. 하지만 이아니스 가슴엔 그 때의 고르고스가 아직도 심연에 출렁였다.

아테네대학으로 떠나기 전, 이아니스가 염소 떼를 이끌고 있는 고르고스를 찾아 아토스의 병풍바위 밑으로 갔을 때 여자는 웃었다. 그것도 흰 이를 드러내고 쾌활하게. 억센 라케다이몬 여자 앞에 어설픈 청년이 장미꽃을 들이미는 모습을 뮤즈의 여신이 보기엔 그리 탐탁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아니스는 망설일 수 없었다. 장미를 받아든 고르고스 표정을 바라본 이아니스는 더욱 절망적이었다. 왜냐하면 고르고스의 눈은 여전히 빙그레 웃었고, 게다가 그 까만 동공은 염소 떼에서 떠나지 않았다. 적어도 감동 비슷한 물결이라도 그 눈가엔 자리하지 않은 것 같았다.

“요즘 당신네 집 담장에 흐드러진 장미를 매일 봐요. 이 거 거기서 가져온 거죠?”

이아니스가 무슨 말을 할 겨를도 없이 여자는 말에 훌쩍 올라타고는 외쳤다.

“이쪽 염소들을 맡아줘요, 마케도니우스.(거친 마케도니아 사나이 라는 의미지만, 이 경우는 샌님인 이아니스를 빈정거리는 말투.)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에요.”

고르고스가 채찍을 들어 하늘을 향해 빙빙 돌리며 말을 몰아 염소무리 뒤편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이아니스는 그녀의 아버지 라코니우스가 왜 자기 딸에게 남성형의 이름을 부여했는지 이해할 만 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이아니스는 알고 있었다. 고르고스가 뛰어난 미모의 암 표범처럼 자신의 여성적 매력을 발톱에 감추고 있다는 것을.

이아니스가 그날 저녁 양 우리를 치워낸 후 어둑해진 마구간을 정리하고 있을 때 고르고스가 불쑥 찾아왔다. 아토스 산에서 보였던 맹렬함은 사라지고, 우습게도 고르고스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메넬라오스 왕에겐 그토록 도도했던 헬레네가 트로이왕자 패리스 앞에서 보였던 바로 그 미소였다.

“이 세상에 가슴 속 사랑을 비밀스럽게 간직한 사람은 나 혼자인줄 알았어요. 저는 이아니스, 당신 마음을 알지 못했고, 또 그래서 혼란스러웠어요. 당신이 아토스 산까지 찾아와 꽃을 건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저는 이아니스, 어떻게 당신에게 말해야 할지, 그러니까 제 말은.....”

마구간의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로 서 있는 고르고스를 이아니스가 세차게 안고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고르고스의 젖은 입에서 복숭아 향이 났으며 그 머리칼에서 올리브와 라벤더가 섞여진 향이 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였다. 기나긴 키스를 끝내고도 고르고스는 이아니스를 풀어주지 않았다. 여자는 이아니스 가슴을 파고들 듯 얼굴을 거기 묻고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은 없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날 저녁 고르고스가 마굿간으로 불쑥 찾아왔다


4

그리스유격대 제2여단 제5연대 제3지대가 올림포스 산 저항군부대의 공식명칭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에 공식적인 정규군은 이미 사라졌다. 그것은 단지 급조해서 꿰어놓은 각 지역 유격부대들끼리 소통하는 수단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이아니스가 처음 올림포스 산에 들어왔을 때, 그를 맞은 대부분 사람들은 아직도 통일된 움직임이나 통일된 복장마저 없었다. 끓어오르는 젊은 피를 조국에 바쳐야한다는 일념 이외의 특별한 행동강령 또한 없었다. 인원역시 각 지류부대마다 천차만별이어서 조직체계도 느슨했다. 사방에 깔려있는 독일군 눈을 피해 모여드는 청년들 숫자가 조금씩 불어나긴 했지만, 이아니스 부대엔 인원도 고작 열댓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육군장교로 복무한 경험이 있고 공학교수를 지냈다는 수염 덥수룩한 중년남자인 리쿠르고스소령이 그들을 이끌면서 조금씩 군대다운 모습으로 변해가긴 했지만, 그 속도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느리기만 했다. 그 와중에 명문 아테네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아니스에게 제3지대 부지대장 겸 훈련교관이란 직책과 함께 유격대 대위계급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이아니스 또한 군대경험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방식에 대한 기초교육조차 받아본 일이 없었던 것은 대부분 다른 대원들과 매 한가지였다. 더구나 아무리 원시적인 군대라 할지라도 적절한 무기와 보급체계, 그리고 통신망의 개설은 필수요건이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었다. 사냥총 몇 자루와 각자 지고 온 약간의 식량이 전부였다. 그토록 모든 것이 부족했어도 대원들 눈은 반짝였다. '저항의 열기' 라는 순수하지만 강력한 공감대가 있었던 것이다. 부족한 여러 상황에서도 그들은 리쿠르고스 대장의 탁월한 지휘아래 산발적이나마 유격작전을 벌였고 독일군 일부부대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무기와 식량 등의 노획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단단한 의지에 신들이 감동했던지 얼마 후 영국군 정보원들이 방문했다. 그들이 며칠간 함께 생활하면서 대원들 신념이 굳건한 것에 믿음을 갖고 돌아간 직후, 영국군에서 군사고문들을 은밀히 파견해왔다. 이후 부대사정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이집트 카이로를 발진한 영국 수송기들이 한밤 중 독일군 눈을 피해 산 속 정확한 좌표로 부대에 필요한 보급품을 떨어뜨려 주었다. 이제 부대원들은 통일 된 군복을 입었고, 통일 된 무기를 소지하게 되었으며 통신기기와 수시로 바뀌어가는 암호 사용법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올림포스 산 밑의 카테리니를 통하여 꾸준히 산으로 들어오는 젊은이들로 인해 제법 많이 불어난 대원들을 이제는 이아니스가 직접 훈련을 시킬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따라 유격작전 대상지역이 넓어졌다. 전술이 예리해진 것 또한 물론이었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지중해와 발칸 지역, 나아가 대규모 유전지대인 러시아의 카프카스 지방을 포괄하는 작전반경의 기지로서 그 한 가운데 자리한 그리스는 지리적으로 중요했다. 추축국(樞軸國)의 하나인 이탈리아가 그리스 침공에 실패하고 나서 결국 독일이 재차 침공하여 그리스를 기어이 함락시킨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렇기에 독일군이 그리스를 침공해 들어오자마자 북부 산악지대에 대규모 레이더 시설을 만들기 시작한 것도 군사전략 차원의 당연한 수순이었다.

산악지대 날씨가 조금 쌀쌀해지는 10월 하순 어느 날, 올림포스산 북쪽에서도 레이더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독일군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올림포스산 제3지대 대장인 리쿠르고스 소령은 먼저 그곳을 정탐해야 했다. 대원들 사이에 지원자들이 넘쳐나자 소령은 직접 다섯 명을 선발해서 한 밤중에 길을 떠났고, 이아니스와 부대원들은 기지에 남았다.

대원들은 소령이 가져올 정보에 모두가 꿈에 젖었다. 당장 레이더 기지를 폭파해버리는 환영이 그들 눈앞에 그려졌다. 지금까지 가졌던 유격전을 통해 얻어진 자신감은 그들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스인들에게 영원한 고결의 상징으로 존경받는 옛 스파르타의 입법자 이름과 동일한 리쿠르고스 대장은 지금까지 작전을 통해 자기부하 희생을 최소화 하면서도 적에겐 큰 타격을 입혀왔다. 그의 작전은 늘 적의 허를 찌를 정도로 용의주도했다. 분명 리쿠르고스와 대원들은 레이더 기지를 정탐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없앨 묘안까지도 가져올 것이 뻔 하다고 남은 대원들은 확신했다. 정탐 팀이 떠나고 나서 대원들이 향후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농담을 나눌 정도였다.

“우리가 적진으로 나아갈 땐 팔랑크스대형(고대 스파르타 육군의 전쟁대형, 8열 종대 밀집대형)으로 가야하는 걸까?”

“그러려면 람다(영문 알파벳 R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알파벳. 대문자Λ 와 소문자 λ)마크 새겨진 방패(스파르타군의 방패)를 준비해야겠지.”

“크시포스 검(스파르타군의 주 무기)과 청동투구도 있어야 할 텐데, 카이로에 있는 영국인들한테 그것들을 당장 보내라고 해야 하지 않겠어? 우린 급하다고 말이야.”

“그러려면 먼저 우린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았어야 했지 않았을까요?”

“어이, 친구. 우리가 지금껏 받은 훈련이 스파르타식 훈련이 아니면 뭐였다고 생각하나?”

“우리를 훈련시킨 크세노폰 대위님도 스파르타와는 전혀 무관한 마케도니아 사람인데요?”

“그렇긴 하지만 그 분의 장인은 확실히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사람이지. 나는 그걸 잘 알아.”

소령과 대원들이 돌아오면 필경 지금까지 그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대규모 유격전이 벌어질 것은 명확했다. 그들은 기대에 들떠 있었다. 독일군에게 좀 더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은 그들 모두의 꿈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아니스 마음속엔 그들과는 달리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독일군이 대원들 생각처럼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가졌거나 가질 정보가 확신에 찰만큼 정확할까. 저들이 가진 정보력은 어느 정도일까.'

산속의 밤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칠흑 같았다. 지금 이아니스 뇌리엔 자신들 앞날도 이렇게 캄캄하다는 생각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지금 이아니스 뇌리엔 자기 앞날도 이렇게 캄캄하다는 생각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5

“당신과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많이 궁금했어요.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그토록 클지는 저도 몰랐거든요. 당신 촉감, 냄새, 음성, 정말이지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이 그리웠어요. 아토스 산에서 제게 장미를 내 밀던 그 표정, 그 바보 같던 표정까지두요.”

호숫가 풀밭에서 이아니스 무릎을 베고 길게 누운 고르고스가 말했다. 여자의 눈은 사랑에 충만 되어 이글거렸다. 여자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이아니스 또한 다를 게 없었다. 쉼 없는 눈으로 이아니스를 애무하는 고르고스로부터 기억에 너무도 선명한 냄새가 났다. 고르고스는 이제 소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신과 약혼할 처녀였다. 이제 고르고스는 자신의 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아니스에겐 고르고스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녀 촉감을 느끼는 이 순간에도. 이아니스가 고르고스를 일으켜 힘껏 안았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사랑에 질투를 느낀 신들로부터 사랑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처럼 보일 정도였다.

약혼식이 끝난 후, 이아니스와 고르고스는 함께 마을학교 문을 다시 열었다. 그동안 가르치던 교사가 전쟁에 복무하다가 전사하고 난 이후로 반년이 지난 후였다.

전쟁은 마을인재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 시스템도 마비시켰고, 사람들 인식마저 졸라맸다.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어디나 학교가 제대로 돌아가는 곳이 드물었다. 특히 북쪽지방인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 주가 심했다. 산악지대이기에 교통이 불편하여 세상과 거의 고립되어 살아가는 마을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재건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독일인에게 당한 국가의 예속은 그리스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아니스 마을 또한 산악마을이었다. 그러나 고르고스 아버지 라코니우스 이장은 무엇보다도 마을행정과 외부와의 유일한 소통길인 우체국, 그리고 마을학교를 재건하는 데 열성을 다 했다. 그는 외지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돌아온 딸과 사위에게도 마을의 책임을 맡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덕분에 고르고스와 이아니스는 학교에서 종일 붙어살았다. 두 사람에겐 말 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 가슴 속에 전쟁과 슬픔, 무질서와 상흔 등이 자리할 틈이 없었다. 아직은.

겉보기에 마을은 변함이 없었다. 아토스 산에서 바라본 마을풍경도 전과 다를 것은 없었다. 파란하늘 아래 낮은 구릉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지붕들. 마을 밖 아토스 산 밑 둔덕 풀밭에 한가롭게 흩어져 풀 뜯는 가축들. 그 한 가운데로 페네이오스강 수원이 실개천처럼 흐르다가 마침내 자리한 호수. 거기서 떨어지는 폭포. 그 물줄기는 아토스 산 너머 옷사 산 쪽으로 길게 늘어지며 조금씩 몸집이 불어났다.

달 밝은 밤, 이아니스가 고르고스의 창문을 두드렸다. 잠옷 바람으로 창을 연 고르고스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이아니스가 꽃 뭉치를 등 뒤에서 꺼내 고르고스 코 밑으로 들이밀었다.

“학교 화단에서 꺾어왔어. 자려는데, 당신 방에 이 꽃향기가 넘쳐났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거야. 그래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왔지.”

“백리향이군요. 오늘아침, 학교 당신책상에 꽂아드린 보답인가요, 이아니스?”

“뭐 그렇다기 보담, 그냥 이 백리향냄새가 좋았어. 이 꽃향기에 취해 당신이 잠들었으면 하는...”

“아, 이제 알겠다. 당신은 내가 보고 싶었던 거예요. 종일 함께 있다가 저녁에 헤어지고도 당신 침대에서 내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던 거죠. 꽃 핑계는 그만두고 사실을 말해 봐요.”

고르고스 따뜻한 손이 이아니스 볼을 어루만졌다.

“아무튼 당신이란 사람. 어떻게 내 속을 그다지도 훤히 알까.”

이아니스가 여자 손에 입술을 댔다. 고르고스 호흡이 가빠졌다.

“이아니스, 얼른 들어와요. 뒤뜰로 해서 발소리 나지 않게. 아버지가 깨어나시면 곤란하니까. 어서요.”

이아니스가 방으로 들어오자 여자가 와락 껴안았다. 백리향 은은한 물결이 고르고스 방을 배회해도 둘은 떨어질 줄 몰랐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달빛이 창으로 밀고 들어왔다. 마침내 이아니스에게서 떨어진 여자가 어깨 브로치를 빼냈고, 고르고스 몸을 타고 잠옷이 미끄러져 내렸다. 고르고스 피부가 달빛에서도 빛나는 모습을 보며 이아니스 숨이 멎었다. 젊은 여체.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할 길 없는 아름다움. 이아니스가 다가가 여자살갗에 손을 댔다. 조심스럽게. 이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살갗에 입술을 댔다. 고르고스 향기와 촉감이 젊은 남자 이아니스를 마비시켰다. 여자가 그의 손을 자기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조금씩 옮겨갔다. 여자는 젖어있었다.

“당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라니.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내 여자라니, 믿기질 않아.”

“오, 이아니스, 오이디푸스콤플렉스 환자처럼 말하지 말아요. 나는 공식적으로도 당신 여자에요. 나를 마음대로 가져도 되는 거예요, 당신은.”

고르고스가 거친 숨소리를 뿜어내는 이아니스 품속에서 말했다.

간절했던 기다림. 사랑의 폭풍은 거셌다. 거대한 파도가 두 사람 가슴으로 몰려왔다. 피할 수 없었다.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그 파도를 온 몸으로 맞아들였다. 그렇게 둘은 오래도록 사랑을 나누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미처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있었다. 창밖에서 달의 여신 셀레네가 질투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폭풍이 물러간 후, 땀 젖은 고르고스가 이아니스 팔에 안겨 속삭였다.

“한 번 더 키스해줄래요?”

이아니스는 고르고스를 안고 키스했다. 아주 긴 입맞춤이었다.

“이아니스, 내 젖가슴에두요.”

이아니스는 풍만한 여자가슴에 매끄럽고도 감미롭게 입을 맞추었다. 그 입술은 목과 어깨, 여자의 땀 젖은 전신에서 춤을 추었다. 그 사랑의 애무가 끝나자 여자가 웃었다.

“오, 이아니스. 내 사랑. 당신은 복종을 잘 하는군요.”

“영원히 복종하고 싶어, 당신한테.”

고르고스가 이아니스 이마에 키스를 하고는 말했다.

“고르고스의 명언이 있어요.”

“고르고스의 명언? 당신도 언제 길이 남을 명언을 말했던가?”

여자가 다시 웃었다.

“나 말고, 스파르타 왕비였던 그 고르고스 말이에요.”

“클레오메네스 왕의 딸이자, 그 유명한 날인 기원전 480년 8월 3일날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죽었던 레오니다스 왕의 부인인 그 여자?”

“역시 내 남자는 똑똑하네요.”

고르고스가 이아니스 얼굴을 끌어안고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런데, 왕비가 뭐라고 말했던가?”

“한 번은 아테네의 귀족부인이 방문해서 물었어요. ‘당신네 스파르타 남자들은 세상을 정복할 힘을 가졌는데, 어째서 스파르타 여자들한테는 그리도 나약한지. 이유가 무엇인지.’ 그때 고르고스 왕비가 그 건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는군요. ‘그 스파르타 남자들을 낳은 사람들이 우리 스파르타 여자들이거든요.’ 라고.”

“그것 참, 명언이네.”

“고르고스 왕비는 사랑하는 남편이 테르모필라이 협곡으로 겨우 300의 스파르타 결사대를 이끌고 갈 때, 알고 있었대요.”

“뭐를?”

“그와 그의 군대가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왕의 군대에 마침내 죽을 것이라는 것을요. 그래도 그 여자는 남편을 격려했어요. 자신에겐 두 아들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단한 여자군. 역시 라코니우스 이장님이 딸에게 이름을 물려줄 만한 여자야.”

“당시 사람들은 남편이 죽으면 거의가 재혼을 했어요. 그것은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일이었대요. 아이를, 특히 아들을 많이 낳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고르고스 왕비는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끝내 재혼하지 않았다는군요. 그토록 아름다웠으면서도.”

여자가 이아니스 품속에서 말했다.

“우린 오늘 밤, 비밀을 간직하게 되었네요. 그렇죠?”

“내일도 비밀을 만들고 싶어.”

“사랑해요, 이아니스.”

두 사람은 또 다시 길고 긴 입맞춤을 했다.   

그리스엔 힘이 필요했다


6

얼마 후, 이아니스의 산속 마을에도 독일군이 진주해 들어왔다. 이 갑작스러운 일로 마을은 공포에 휩싸였고, 그 공포는 현실로 나타났다. 이민족 군인 집단이 마을에 주둔하게 된 일은 마을사람들에게 국가의 부재라는 현실을 통렬하게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장 마을 행정건물과 학교건물이 징발되었다.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소, 말, 마차 등의 징발목록을 강압적인 눈빛으로 제시했다. 날이 갈수록 라코니우스 이장의 수첩엔 고통의 기록들이 깨알같이 늘어만 갔다. 가뜩이나 말 수가 적은 그의 입은 이제 웬만해서 열리지 않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옛 스파르타 동족 병사들을 꿈속에서라도 불러 내 이 무자비하고 염치없는 게르만 야만족들을 여지없이 쳐부수고, 파이안(고대 그리스 병사들의 군가)을 목청껏 부르고 싶은 마음만이 이 라케다이몬 사나이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의 시야가 현실로 돌아오면 불끈 쥔 주먹만이 부르르 떨릴 뿐이었다. 힘의 부재는 직면한 현실이었다. 그 때 이아니스가 찾아왔다.

“올림포스 산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평소 온화했던 이아니스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내려앉은 표정에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 올림포스 산의 의미가 무엇인지 라코니우스 이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그의 말을 가로막아야 한다는, 그의 계획을 철회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더구나 자신과는 평생친구인 그의 아버지 데미트리우스 크세노폰이 지금 병마와 싸우고 있다. 일평생 아토스의 거칠고 척박한 땅을 일구어 낸 마케도니우스(거친 마케도니아 사나이)도 나이와 병마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라코니우스는 잠자코 있었다. 이아니스와 같은 젊은이들이 힘을 모아야한다는 것을 그는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스엔 힘이 필요했다. 이아니스 어깨에 말없이 손을 얹어놓는 그의 눈이 붉어졌다.

“제 아버지와 누이동생 에토니아를 부탁드립니다. 물론 고르고스도.”

“고르고스는 알고 있는가?”

“말하지 않았습니다. 슬퍼할 테니까요. 저는 고르고스의 슬픔을 볼 수가 없습니다.”   


     

7

정찰을 떠났던 리쿠르고스 소령과 다섯 명의 대원들은 돌아올 예정일이 이틀이나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부지대장 이아니스는 초조했다. 하지만 대원들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독일군과 조우했다면 이 지역 독일군 사령부가 있는 카테리니 쪽에서 연락이 올 터였다. 그 도시엔 저항군연락책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원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이럴 때 지휘자 의견 한마디가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이아니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아니스는 무엇을 어떻게 조치해야 할지, 어떤 명령을 대원들에게 내려야 할지 난감했다. 무작정 기다리는 일 역시 위험했다. 어쩔 수 없이 동트기 전, 이아니스는 세 명의 대원들을 뽑아 소령의 정찰 팀을 찾아 떠나보냈다. 위험은 도처에 깔려있었다. 발칸과 그리스, 그리고 지중해 전체 제공권을 독일 비행기들이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산속에 은거하고 있는 유격부대라고 해서 독일 정찰기의 눈에 뜨이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이아니스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음이 답답했다.

벌써 11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산속날씨가 걷잡을 수 없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올림포스 산 고지대에 자리 잡은 부대는 가을을 느끼기도 전에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이윽고 리쿠르고스 소령을 찾아 나섰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독일군레이더기지가 건설되고 있는 은밀한 장소를 지도에 표기해놓았다.

“대장님과 대원들은 아무래도 생포된 것 같습니다. 양떼를 몰던 어떤 노인이 말하길, 엊그제 유격대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독일군차에 실려 산 밑으로 호송되는 것을 똑바로 봤다고 하더군요.”

그 말의 의미는 지금껏 숨어 지내던 유격대 올림포스부대 위치가 독일군에 알려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독일군들은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사력을 다 할 것이다. 이아니스는 자신과 대원들 앞에 놓인 고행의 길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이아니스는 대원들과 함께 밤을 도와 부대를 능선 너머 천연동굴로 옮겼다. 그곳은 유격작전을 펼치다가 우연히 발견 된 장소였다. 가파른 지점에 자리했지만, 우거진 숲속에 가려진 동굴이라 적의 정찰기에 포착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점이 있었다. 이아니스는 그리고 몇몇 대원을 이끌고 직접 산을 내려가 카테리니 쪽 정황을 살펴야 했다. 가능하다면 소령과 대원들도 구출해내야 한다.

카테리니에 도착해보니 정보를 수집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올림포스유격대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소령과 대원들이 곧 공개처형 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시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항군스파이들마저 머리를 흔들었다. 그들을 구해 낼 방법은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상부의 새로운 지시라며 이아니스에게 말했다.

“대위님을 소령으로 진급시키고 올림포스 제 3지대 대장으로 임명한다는 전문입니다.”     

카테리니 시청 앞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그들 표정 모두가 어두웠지만 날씨는 쾌청했다. 광장 앞엔 세 개의 말뚝이 박혀있었다. 여섯 개가 아닌 세 개. 소령 일행 중 세 명은 이미 희생되었다는 의미였다. 이제 이 말뚝에 매여질 세 명 또한 그들 뒤를 따를 것이다. 물론 이아니스는 알고 있었다. 저들 뒤를 자신도 곧 따르게 될 것을. 그러나 자신의 죽음만은 적에게 좀 더 치명상을 입힌 대가가 되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 독립이 조금이라도 앞당겨져야 한다. 그것은 모든 대원들의 소망이었다.

독일군에 이끌려 절뚝거리며 나타난 한 사내 모습이 보이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칼, 덥수룩한 수염, 얼굴과 온 몸의 핏자국, 심한 고문에 시달린 모습의 리쿠르고스 소령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군중들 앞에 선 그 얼굴엔 엷은 미소가 깔렸고 핏발 선 눈에서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 눈을 힘겹게 들어 사람들을 비잉 둘러보자 웅성거림이 멎었다. 순식간에 광장이 조용했다. 침묵의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결국 리쿠르고스의 온 몸으로 짜낸 듯 한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선명했다.

“나는 유격대 대장인 리쿠르고스요. 나는 지금 저놈들에게 죽소. 그러나 그리스는 영원할 것이오. 그 어떤 이도 그리스를 없앨 수는 없소.”

그의 처절함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적에게 좀 더 큰 위해를 가해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서러움이자 안타까움이었다. 독일병사 하나가 등을 후려쳤고 그는 쓰러졌다. 그가 힘겹게 일어서며 무언가 말을 이어나갔지만 그 목소리는 확실히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아니스 가슴에서 그 목소리는 크게 울렸다.

“그리스 만세.”

그는 분명 그렇게 외쳤던 것이다.

이어서 두 명의 대원이 끌려나왔다. 그 중 하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겨우 스물 남짓한 청년이었다. 그가 뒤에서 떠미는 독일병사에 의해 주춤 거리다가 이아니스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의 다리가 꺾였다. 그리고는 목 놓아 울었다. 지독한 고문에 패배당한 영혼이 그 울음 속에 담겨있었다.

총살이 끝나자 독일군 장교 하나가 군중 앞에 서서 그리스어로 외쳤다.

“우리 독일군에 대항하는 자는 모두 이렇게 된다. 너희 그리스 정부는 정식으로 우리 독일에 항복했다. 섣불리 우리에게 대항하는 짓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가 잠시 군중을 둘러보고는 다시 외쳤다.

“이 중에 이아니스 크세노폰이나 그 졸개들이 있다면 들어라. 너희는 부대를 해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세계최강의 우리 독일군대에 대항하는 행위는 무모한 짓이다. 우리는 이미 너희에 대한 자세한 정보까지도 갖고 있다. 우리에게 끝까지 대항한다면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이아니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들을 향한 분노가 억제력의 도를 넘어선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지만 누군가 뒤에서 붙잡았다. 순간, 돌아보는 이아니스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 뜻 밖에도 라코니우스 이장이 침통하게 서 있었다.  

“그리스 만세.”그는 분명 그렇게 외쳤다.


8

"자네아버지 데미트리우스가 위독하네. 아마도 며칠을 넘기기 힘들 것 같아. 그래서 자네를 수소문하기 위해 카테리니엘 왔는데, 신께서 도와 만나게 되었군."

대원들과 함께 두 사람이 광장에서 슬며시 뒷걸음 쳐 골목 으슥한 카페에 앉자마자 라코니우스가 말했다. 이아니스가 말없이 쳐다보자 라코니우스가 다시 말했다.

"자네부대가 몹시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것을 여기 카테리니에 와보니 알겠군. 그러나 이아니스. 며칠만 시간을 내서 나와함께 고향마을로 가세. 자네아버지가 눈감기 전에 말이야. 데미트리우스는 죽기 전에 자넬 꼭 한 번 보고 싶어 한다네."

카테리니 사람들 뇌리에 리쿠르고스의 절규가 새겨진 날이었다. 또한 독일인들에게 올림포스 유격부대 거의 모든 비밀이 드러났을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평소 침착하고 용의주도했던 소령이 어쩌다가 독일군에게 잡히게 되었는지 의아했지만, 어쨌거나 함께했던 대원들과 그는 독일군에게 희생되었다. 그것은 명백한 현실이었다. 독일군은 삽시간에 동유럽 전체를 짓밟고 세계최강국의 하나인 프랑스를 전격전으로 베네룩스 3국과 함께 단 6주 만에 점령한 군대였다. 뿐만 아니라 발칸지방 여러 나라와 그리스, 그리고 최근엔 크레타 섬 까지 함락시켜 지중해의 제해권마저 빼앗아 영국을 더욱 고립시켰다. 그것은 전쟁에 필요한 기술과 장비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우수성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을 상대로 싸워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전쟁방식과 전술능력으로는 어림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아무리 신출귀몰한 유격전이라도 좀 더 새로운 전술이 절실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원들의 값없는 희생만 이어질 것이다. 리쿠르고스가 사라진 지금, 무거운 책임감이 이아니스를 압박했다.

'어서 부대로 돌아가 이 위기를 돌파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 긴박한 순간에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니. 아, 아버지.'

이아니스가 고개를 들었다. 감당할 수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는 말했다.

"저는 지금 고향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리쿠르고스 대장의 뒤를 이어 부대를 이끌게 된 몸인 만큼, 어서 돌아가 대원들을 추슬러야 합니다."

라코니우스가 이아니스의 손을 굳게 잡으며 그의 젖은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네 심정은 이해하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이 라코니우스가 권한다면 그렇게 해야 되는 거야. 세상일이란 신께서 주관하는 걸세. 자넨 먼저 아들의 도리를 지킨 후에 국가를 위한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신이 자네와 부대원들을 도울 걸세."

옆 탁자에 앉아 숨죽이며 밖의 동정을 살피던 부대원이 일어서 이아니스에게 걸어왔다. 중년의 그가 모자를 벗어 가슴에 얹고는 오른손을 뻗어 젊은 이아니스 어깨에 올려놓았다.

"대장님, 그 가슴에 통한의 슬픔을 안고 부대로 돌아가실 수는 없습니다. 걱정 마시고 고향엘 다녀오십시오. 저희가 적절하게 조치를 취해놓고 대장님을 기다리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곧바로 독일군기지를 공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경계가 강화되었을 테니까요. 저들이 허점을 노출할 때까지 우리에겐 다소 간의 시간이 있습니다."

결국 그는 이아니스를 설득했고, 이아니스가 일어나 그를 부둥켜안았다.


9

한밤중의 마을은 고요했다. 독일군본부로 사용하는 마을의 행정건물과 독일군이 주둔하고 있는 마을학교에도 적막에 휩싸였다. 예전 평화로웠던 시절의 마을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독일군의 존재는 강하게 느껴졌다. 넘실거리는 차갑고도 이질적인 공기. 라코니우스의 발길을 좇아 어둠을 헤치고 가던 이아니스가 품속의 권총을 자꾸만 확인했다. 이곳이 이아니스 크세노폰 고향마을이라는 것을 독일군이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의 촉수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이아니스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그가 고향마을을 극비리에 방문한 것이다.

"저로 인해 고향마을 사람들이 값없는 피해를 입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확신하네. 자네가 다녀간 사실은 나와 자네가족, 그리고 신만이 아실 테니까."

얼마 전 이피로스의 저항군들이 산악행군을 하던 독일군 대대병력을 매복 섬멸해버린 일이 있었다. 그러자 독일군은 즉각 보복에 나섰다. 근처마을의 12세 이상 남자들을 전원 처형시키고 마을을 모두 태워버렸다. 전쟁은 삶의 참화를 넘어 인간 형질(形質)의 이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아니스는 독일군의 힘이 아니라 그들의 야만성이 두려웠다.

아버지 데미트리우스 크세노폰은 이아니스 손을 잡고 결국 운명했다. 평생 아토스 거친 산악을 누비던 마케도니우스가 아들 손을 잡고 운명했을 때만은 그 얼굴에 평안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아니스는 아버지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이아니스가 아버지 관 뚜껑을 닫으며 돌아설 때 라코니우스가 말했다.

"카테리니행 기차가 여덟시에 출발하네. 어서 가게. 기차역에서 고르고스가 기다리고 있네."

문을 나서려는 이아니스에게 눈물에 퉁퉁 부은 에토니아가 안겨왔다. 이아니스가 누이동생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 손길에 동생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오라비의 고통스러움이 배어있었다. 이아니스는 집을 나섰다.   

기차역에서 고르고스가 기다리고 있네


역사(驛舍)엔 카테리니행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도시인 카테리니에서 식량을 구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최근 전쟁의 참화와 함께 기아가 그리스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그리스의 여러 물자와 함께 식량마저 빼앗아 전쟁에 충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파 속에서 총을 멘 독일군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이 무작위로 사람들을 검문하는 것을 보며 이아니스는 모자를 더욱 눌러썼다. 사람들 틈에 끼어 고르고스와 함께 앉아있는 이아니스에게 그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갔다.

"꼭 돌아와야 해요."

이아니스 손을 잡고 있는 고르고스가 소리 없이 울었다. 이아니스는 말이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한참 후에 겨우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난 돌아올 거야."

고르고스는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자신의 뱃속에 그의 생명이 자리한 것을. 그 옛날 스파르타 왕비는 자기에게 두 아들이 있다는 것으로 전쟁터를 향하는 자기 남자를 안심시켰다. 그녀의 남자 레오니다스 왕은 끝내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렇기에 고르고스는 새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남자에게 더더욱 꺼낼 수 없었다. 고르고스 마음은 간절했다.

마침내 이아니스를 태운 기차가 카테리니를 향해 떠나가고, 그 자리에 고르고스가 홀로 남았다. 기차에 오르며 애써 웃음 짓던 이아니스 얼굴이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 했다.

"꼭 돌아와야 해요."

고르고스는 기원전 480년, 그 왕비 운명을 자신은 피할 수 있게 되기를 신께 빌었다. 이아니스 또한 약속했다. 돌아오겠다고. 돌아오겠다고.

그러나 이아니스를 떠나보낸 지금, 고르고스 가슴에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온갖 보복과 만행을 서슴지 않는 독일군을 상대로 싸우는 사람들.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들을 굴복시키고 나라 밖으로 쫓아내려는 사람들. 그들이 담보해야 할 것은 오로지 생명밖에 없다는 것을 고르고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불안은 그녀 가슴을 옥죄었다.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물러간 후, 군용 지프가 마을로 들어와 라코니우스 이장에게 상자를 전해줄 것이란 사실을 당시의 고르고스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 가슴은 그 일을 미리 예견했는지 모른다. 이아니스 유해와 유품이 들어있을 그 하얀 상자.

10

독일군이 그리스 땅에서 물러갔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많은 나날 애 태우며 고르고스는 이아니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소식도 없었다. 마침내 이아니스가 돌아왔을 때 그는 유골함에 들어있었다. 유골이 들어있던 하얀 상자 한 쪽에 평소 이아니스 성품처럼 단정하게 들어있는 유품을 끌어안고 고르고스는 오열했다. 그 낡고 헤어진 군복과 빛바랜 수첩, 만년필 등에서 아직도 그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 속에 이아니스의 편지가 있었다.



'여기도 가을이오. 하지만 이곳 산악 고지대 바람은 몹시 차갑소. 우리는 동굴에 거처하긴 하지만 새벽한기는 살을 파고 들 지경이오. 그래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소.

우리는 오늘 밤 길을 떠나, 동트기 전에 적진을 공격할 예정이오. 아마도 이번작전은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대규모전투가 될 것이오. 우리는 이 작전을 위해 준비를 많이 했소. 그리고 기필코 승리해야 할 전투이기도 하오.

그동안 당신에게 여러 번 편지를 쓰긴 했지만 모두 없앴다오. 이번 작전에서 내가 살아남는다면 이 편지 또한 사라질 것이오. 그러나 만약 내가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 편지라도 당신에게 갈 수 있기를 바라오.

우리 유격부대원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소. 왜냐하면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한 군대를 맞아 싸우고 있기 때문이오.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우리는 적을 보고 있지만 적은 우리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오. 우리는 그렇게 한 가지라도 적보다 우위에 서려고 노력하고 있소. 그 '한 가지'는 매우 중요한 군사적 이점이오.

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많은 것이 부족하오. 무기와 정보는 물론이고, 식량까지도 말이오.

지난 번 작전 때 대원 한사람이 독일군의 군견 한 마리를 생포해 돌아왔소. 이 군견이 어찌나 온순한지 우리는 위생병이라 부르고 있다오. 이 개가 독일어를 할 줄 아는 나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소. 그런데 우리에게 이 군견의 용도가 무언지 아시오? 비상식량이라오.

영국인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화살 총이 있소. 작전을 나갈 때 여러 가지로 유익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특히 사냥할 때 편리하다오. 소리가 나지 않으니. 며칠 전 산 속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산양 한 마리를 만났소. 녀석이 한가롭게 풀을 뜯다가 나를 돌아봤는데, 그 고요하지만 겁에 질린 눈동자에서 내 자신을 보게 되었소. 내가 겨눈 화살이 몸에 박히면 그것으로 녀석은 끝나는 운명이었지. 그 때, 나는 신을 바라보았소. 나도 절박했는지 모르오. 살아서 당신을 만나고픈. 나는 쏘지 않았소.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지.

산악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는다오. 뱀과 다람쥐까지도 모두 수프의 재료가 될 수 있으니까. 그래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소. 우리 목표는 적을 그리스에서 몰아내는 것이기에, 그에 필요한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감내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렇지만 고르고스.

당신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소. 그것을 감내하기엔 고통이 따르오. 아직도 기차에 오른 내게 손을 흔들던 당신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소. 당신은 나를, 나는 당신을 향해 부르짖던 마음 속 메아리가 귓전에서 울리고 있듯이 말이오.

내일 작전에서 죽는 것은 두렵지 않소. 내가 두려운 것은 당신에게 슬픔을 안기는 것이오. 그렇기에 나와 대원들의 안전을 기도하고 있소. 그 결과는 신만이 알고 있겠지. 우리는 서로에게 아직도 줄 것과 받을 것이 있소. 소중한 이야기들 말이오. 신께서 그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주길 바랄 뿐이오.

그래도...

당신이 이 편지를 읽게 된다면, 나는 떠나고 없을 거요. 그 또한 신의 뜻이라고 여겨주길 바라오. 내 죽음은 그리스를 위한 것이었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았으면 좋겠소. 그리고 고르고스.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해주길 바라오. 나 이아니스 크세노폰은 당신남자로 살았던 사실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했다오.

이제 떠날 시간이오. 대원들을 집합시켜야겠소.

우리의 이 작전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당신에게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

사랑하오. 고르고스.

이만 쓰겠소.

올림푸스산에서. 1943년 11월 17일. 당신의 이아니스.'    

당신이 이 편지를 읽게 된다면, 나는 떠나고 없을 거요


11

쾌청한 한 여름 오후, 하늘은 푸르렀다. 학교 앞 잔디밭에 고삐 풀린 말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저 멀리 아토스 병풍바위 위로 뭉게구름이 넘실거렸다. 그 앞으로 여리게 흐르는 페네이오스 강이 가로지르는 밀밭너머 양과 염소 떼가 몰려다니는 둔덕 또한 평화로웠다. 독일군과의 전쟁은 끝났어도 국가는 다시 내전의 전운이 돈다는 풍문이 들려오기도 하지만, 아토스 산악지대에 자리한 마을까지 그 풍문은 멀기만 했다.

아이들이 학교 옆 화원에 모여들었다. 그곳엔 이 학교 교사로 일하던 두 사람 묘소가 나란히 있었다. 지난 전쟁에서 국가를 위해 산화한 두 젊은 교사 유해를 학교에 모시자는 마을사람들 의견에 따라 안장 된 묘소였다. 마을학교 교사인 고르고스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교사들에 대해 설명을 하던 중, 이아니스 크세노폰 유격대 소령의 묘 앞에서 목이 막혔다. 11월의 그 날, 카테리니행 기차에 오르던 이아니스 모습은 고르고스 가슴 속에 박재가 될 것이다. 두 사람 비밀을 알고 있는 달의 여신 셀레네 또한 영원히 침묵하겠지.

아이들이 돌아간 후 유모차를 끌고 온 에토니아가 고르고스에게 아기를 안겨주었다. 잠자코 젖을 물리고는 고르고스가 아기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에 이아니스가 담겨있었다. 작은 이아니스. 이아니스 크세노폰은 사랑하는 고르고스를 위해 끝내 자기 생명을 남겨 둔 것이다. 고르고스 눈물이 아기얼굴에 떨어졌다. 옆에서 에토니아도 흐느꼈다.


-끝-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데오도라키스의 가곡, 작사자 미상,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남긴 채 앉아만 있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https://youtu.be/lYG696u6nHs?si=1Yoa5GOaOqGa5Ktn

(다시 듣기)      조수미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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