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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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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준 Jun 20. 2024

대청의 구름 속에 사는 ‘멸종 위기종’

설악산 사진가 성동규


처음 몇 년간은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그저 설악의 어느 능선에 오르고 계곡에 숨어들어 하루 종일 누워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과 서북릉 너머로 사라지는 석양만을 바라보며 지냈다. 허기가 지면 밥을 끓여 먹고, 어둠이 내리면 텐트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남들 말하는 허송세월을 하며 계절을 견디는 동안 온몸은 설악에 흠뻑 젖었다. 그 ‘어느 능선과 계곡’은 설악의 외형을 익히기 위함이었고, ‘빛을 따라간 시선’은 설악의 내면을 탐구하였던 것이라 그는 말했다. 요즘말로 하면 ‘포인트 헌팅’이다. 그리고 비로소 카메라를 든 건 1978년, 충무로를 떠나 설악에 들어온 지 5년여 만이었다. 


“그저 산만 보면 좋았던 거지…. 그땐 산악사진이라는 분야 자체가 없었어요. 산 사진을 찍는 분은 김근원, 임석제 선생 정도였죠. 그분들이 설악산에 와서 조수에게 가방을 들려 산에 오르는 걸 보면 어찌나 부럽던지. 사진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지만 말도 못 붙이고, 어떻게 찍나 먼발치서 훔쳐보는 게 다였는데도. 당시엔 ‘작품’이 아니라도 좋으니까 나도 뭔가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진가 성동규는 그렇게 사십여 년 전 그 시절을 회상했으나, 속초 엑스포 광장에서 온통 먹구름에 싸인 대청봉을 올려다보는 시선은 여전히 현재에 있었다. 


“사실 오늘도 산에 갔어야 해요. 비가 오던 눈이 오던 바람이 불던. 늘 가야지. 당신들이 온다 하는 바람에….” 


일기예보에서 전국에 폭우를 알리고 있던 날이었다.       

40년 전 우연한 설악산행이 바꾸어놓은 삶

그가 산을 접한 건 1972년, 친구 안승일(사진작가, 고령산악회)씨의 권유로 당시 한국산악회에서 하던 전국 명산순례 설악산행에 참가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대전이 고향인 성씨는 어릴 적부터 유독 사진에 관심이 컸지만 카메라를 본격적으로 잡게 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 월남전에 참전해 맹호부대에서 사진병으로 활동하면서부터였다. 본래 포병부대원이었으나 사진 잘 찍는다는 주변 이야기에 보직을 옮긴 것이었다. 제대 후 상도동에서 현상소를 운영하며 주변 작가들로부터도 ‘잘한다’ 소리 들으며 일상을 보내던 그는 문득 ‘고작 이것이 사진을 배우려 했던 이유였나’하는 생각에 갈등하던 중, 우연히 설악엘 가게 된 것이었다. 


“용대리에서 백담골로 산행을 했는데, 아, 여기가 내가 평생을 살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때 설악에 처음 와본 어떤 여자 참가자들은 물빛을 보며 펑펑 울기까지 했어요.”


서울로 돌아온 그는 바로 가게를 정리해 속초로 떠났다. 스물여섯이었으니 아쉬움도 버릴 것도 없던 시절이다. 산을 떠돌며 호구지책으로 신흥사 앞에 작은 현상소를 열기도 했으나, 비우는 날이 더 많았다. 설악동이 정리되면서부터는 중도문리에 작은 집을 짓고 창고에 암실을 만들었다. 이제 카메라를 들 준비가 되었다고 여긴 시점이었다. 


“카메라를 처음 잡는 사람은 누구든지 풀샷을 많이 찍죠. 나도 그랬어요. 한땐 구름에 미쳐서 구름 하나라도 프레임 안에 꼭 들어와야 셔터를 눌렀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바보 같은 짓이죠.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그런 사진들로 캘린더 만들어서 팔기도 했지만. 옛날에 찍은 사진들 보면, 아 내가 이런 사진도 찍었구나 새삼 느껴요. 캘린더 사진으로 돈을 만들었지만 그건 내 사진이 아니야. 캘린더 사진이지. 시골에 있다 보니 사진 팔 재주도 없고, 어느 땐가부터 파는 사진이 아니고, 나만의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야. 객관성을 탈피해 내가 보는 자연, 내 주관이 배인 사진 말이죠.”      


오로지 산과 나만이 대면해야

“처음부터 철저히 혼자였어요. 여럿이 가면 이야기도 해야 하고, 쉬기도 해야 하고 먹기도 해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정작 산을 못 봐요. 혼자 가면 머릿속에 생각을 하고 그림을 그리거든. 요즘에야 사람도 만나고 하지만 예전엔 산에 들어가면 식량 떨어질 때까지 한 달씩 살고, 사람보다 산속에서 산을 쳐다보는 게 좋았으니까. 지금도 밑에 있으면 기운이 하나도 없어도 등산화 끈만 조이면 힘이 나요.” 


그래도 그 주변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산악인들이 여전히 많다. 과거의 설악은 당대를 가로지른 한국적 알피니즘의 과제였으며, 거기엔 숱한 알피니스트들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성씨는 1975년 토왕성폭 하단 초등 당시에도 건너편 토왕좌골 능선에 올라 그 장면들을 촬영했었고, 이후로도 많은 산악인들과 진한 인연을 맺어왔다. 단풍철이 지나고 썰물처럼 유산객들이 빠져나간 뒤, 대청에 초설이 내리는 계절, 적막만이 흐르는 설악동 여관촌에 남아 산을 오를 궁리만 하던, 완전 ‘또라이’ 같던 우리들이라고 그는 당시를 기억했다.  


“가서 내가 좋은 장면을 만나면 거기가 좋은 곳인 거지. 내 자식이 큰 놈이나 작은놈이나 같듯이 좋고 나쁜 게 어디 있나. 요즘은 식생이 다양한 곳을 찾는 것이 좋아요. 식생이 단순한 곳에 가면 괜히 힘들고 짜증 나고….”


지금까지 오른 설악산 중 가장 ‘좋은 곳’이 어디냐는 우문에 그가 내린 현답이었다. 내 자식 같은 산,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소년을 벗고 점점 세상에 찌들어가는 설악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다.   


“어딜 가도 그래. 향로봉에를 가 봐도, 지뢰지역이라고 해도 사람들 흔적이 다 있어요. 사람들이 송충이가 솔잎 갉아먹듯이 산을 갉아먹은 거죠. 산이 걸레가 된 거지. 산에 가는 사람부터가. 전부 유산객 들이니 하루 산에 와서 스트레스 풀고, 인증숏이나 찍고 몇 시간 만에 주파했다는 둥. 그런데 차라리 하루 와서 쓰레기나 버리고 가는 그 사람들이 나아. 산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대청봉에 가면 땃두릅 군락지가 있었어요. 멸종위기종인데 그게 천삼오갈피라고 약초로 팔리거든. 어느 날 가보니 누가 싹쓸이를 해 간 거야. 그게 다 산 안다 하는 사람들이 한 짓이지. 심지어 효능이 좋다고 방송에까지 나와. 세상에 별놈들이 다 있죠.”


멸종, 그의 말을 받아 적으며 멸종이라는 말에 굵은 동그라미를 쳤다. 산도 멸종하고 결국 산을 오르는 사람도 멸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산을 이용하고 즐기는 쪽으로만 생각하는데, 자기중심에서 자기 편한 대로만 살려하는 것이다. 이용이 아니라 산 다니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 아니냐”라고 재차 강조하는 그의 음성은 환경운동가의 목소리보다도 더 날이 서 있었다. 


성동규 씨가 요즘 하는 일은 산림청 위탁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설악산 고산식물의 생태에 대해 모니터링하는 작업이다. 10년 프로젝트로 이제 4년여 째 해오고 있는데, 사철 산에 올라 다양한 식생을 들여다보고, 촬영하고 채집해 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과제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보면 이제야 적성에 맞는 제 일을 찾았다고도 생각한다. 언제든, 어디든, 경제적 부담에서 벗어나 산에 갈 수 있고, 찍을 수 있고, 또 혼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좋은 건 “지금까지는 큰 산, 덩어리만 보아왔다면 이제는 좀 다른” 무언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큰 산을 보고 아! 했는데, 지금은 이 작은 풀꽃을 보고도 아! 해요. 새순이 돋는 봄부터 전부 홀랑 벗는 겨울까지 매일 같은 나무, 같은 풀꽃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며 거기서 새로운 눈을 뜨고 있는 거죠.”      


다시 빛의 의미를 생각한다

외손자와 함께 저만치서 놀아주고 있는 그의 아내를 보며 사진 찍는 남편, 그것도 돈 안 되는 산 사진 찍는다고 몇 달씩 산에만 들어가 있는 가장을 가족들이 원망하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 살게 되더라고. 고생은 많이 했겠죠.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잘 살았다고 말할 거야. 물어보라고. 젊었을 때는 돈이 전부인 것 같죠. 그런데 살아가며 스트레스받지 않고 사는 게 더 좋은 거야. 못 먹고 마음 편한 게 좋아요. 좋은 옷 입고 좋은 집 사는 게 잘 사는 삶이 아니야. 엊그제 김기덕 감독이 텔레비전에 나온 걸 보니(주 :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어쩌면 나도 열등감에 산으로 산으로만 갔을 수도 있다는. 그런데 이제 뒤로만 빼는 것만이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속초에 작은 갤러리 하나 꾸미고 싶은 소원이 남았고, 거기 ‘성동규’ 이름 세 글자를 내걸어 사람들이 설악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는 게 꿈이라는 것이다. 


“착상이 잘 안 떠오른다고 고민을 털어놓는 젊은 후배들에겐 철저하게 고독해보라고, 끝까지 외로워보라고 이야기를 해요. 스마트폰이 없으면 못 사는 세대들이라 내 말이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철저히 고독해보면 그 속에서 꿈을 꿀 수 있고, 그 꿈을 그려볼 수도 있다고. 결과야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자신에 맞는 꿈을 찾을 수 있겠지.” 


“이제 빛의 의미에 대해 다른 생각이 들어요. 역광이건 순광이건 사광이건 그때그때 산의 변화에 따라 찍는 거지. 예전엔 희운각 산장에 사진 찍겠다고 모인 사람들은 날이 흐리면 누구도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어요. 그런데 난 흐린 날에도 찍고 싶어. 그건 한 시대의 고정관념이거든. 사람들이 내 사진을 보고 같은 장소엘 가도 막상 거기서 들이 대지를 못해요. 고정관념 때문이지. 비슷한 사진이 많아질수록 사진의 생명력은 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들이 안 다니는 데만 다시 찾아다녀요. 흐흐,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동규가 죽은 줄 알지.” 

대청은 여전히 짙은 구름에 싸여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그래서 삼대가 덕을 쌓았거니 말거니 투덜대며 그곳을 내려올 한 무리의 산꾼들을 프레임 바깥으로 밀어내며 100밀리 접사렌즈로 구름 속을 당겨보고 있을 성동규의 눈동자엔 무엇이 비치고 있었을까. 혹시, 바람?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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