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JOBS Sep 13. 2023

탈애플워치

숫자 노예의 활동칼로리 강박 탈출 일기

2년 전쯤 구입한 애플워치가 갑자기 사망했다.


잠자고 샤워하는 시간 외에 몸의 일부처럼 손목에 차고 다녔던 애플워치는 거의 신체의 일부였다.

하루동안 얼마나 움직이고 운동을 했는지 리포트되는 수치를 매일 눈으로 확인하다가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불안감과 초조함마저 들었다.


집 근처 서비스센터에 방문했다.

메인 보드가 망가진 것 같단다.

현 시세 기준 329,000원인 SE모델의 수리비가 289,000원이 나왔다.

이것은 그냥 다시 새 걸로 구매하라는 이야기?

수리 상담해 주시는 분도 고치는 것보다 새로 사는 게 낫겠다며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하단다.

사실 그분이 죄송할 일은 아니지만.


2년 사용 기준으로 계산해 보니, 하루에 약 450원씩의 비용을 지불한 셈이다.

이 비용이 비싼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애플 워치 8세대까지 출시된 시점에서 주변엔 3세대도 멀쩡하게 잘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2년밖에 안 된 내 것은 이렇게 빨리 망가진 거냐고?!

(*참고로 나는 워치를 전혀 험하게 사용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외관이 너무 깨끗해서 새로 샀냐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유지와 관리를 잘하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나처럼 몇 년 안 돼서 고장 난 사람들이 종종 있었으며, 다른 모든 기계가 그렇듯 애플워치 역시 뽑기 운이라는 게 있었다.

이 때문에 열받아서 애플워치가 고장 난 사람들은 가민으로 갈아탔다는 후기도 꽤 많이 보였다.

이런 글들을 읽고 나니 다시 애플 워치를 다시 구매하고 싶지도, 그렇다고 고쳐 쓰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브랜드는 사고 싶은 모델도 없었고, 무엇보다 살 돈도 없었다.

그래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애플워치 없는 생활을 해보기로 했다.




애플워치 없이 요가 수업을 했던 날.

우선 손목이 허전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고, 운동 시간이나 활동 칼로리를 확인할 수 없다는 불편한 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더 좋은 점도 있었다.

시간과 활동 칼로리를 확인하다 보면 정신이 흐트러지고 잡생각이 많아지기도 하는데, 이런 숫자를 볼 수 없는 상태에서는 오롯이 내 몸의 움직임에만 신경을 쏟게 된다는 점.


애플워치에 찍히는 결과물에 의존하다 보면, 평소보다 활동 수치가 낮으면 왠지 모를 패배감(?)이 들기도 하고 딱히 엄청 힘든 것 같지도 않았는데 수치가 높게 나오는 날에는 칼로리 소모를 많이 했구나라는 착각이 들곤 했다.


물론 애플워치의 기술이야 당연히 객관적이고 신빙성 있는 시스템이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으며, 사실 매일 비슷한 시간과 활동 칼로리가 찍히기는 해서 아마 워치가 없었던 날에도 비슷한 숫자들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숫자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실질적인 내 몸에 대한 집중력은 다소 떨어지는 것은 사실.

그리고 운동 시간을 확인하느라 중간에 계속 시계를 흘끔흘끔 보게 되는데, 시계 자체가 없으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길이 없어서 시간 확인을 아예 포기하고 마음을 비우게 된다.


애플워치 없는 요가 수업을 한 날, 동작들이 끝나고 마지막에 사바사나 자세로 매트 위에 누웠다.

눈을 감고 누워서 가만히 돌이켜보니 이 날은 나 자신과 내 몸의 움직임에만 온전히 신경을 쏟아부은 것 같아서 평소보다도 훨씬 뿌듯하면서 이상하게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




한 때는 하루 활동 칼로리 링을 다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 밤늦은 시간까지 집 근처 공원을 굳이 몇 바퀴 돌고 오던 날들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왜 그렇게 활동 칼로리 링을 채우기 위해 하루하루 사는 사람 마냥 숫자와 링 색깔에 집착을 했나 싶어서 다소 나 자신이 웃기고 어이없기도 하다.


새삼스레 우리네 삶은 온갖 숫자에 의존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운동이나 다이어트 등, 자신을 관리하는 일에 관련된 것들.

활동 칼로리를 측정하고 음식 칼로리를 계산하면서 더하기 빼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사고의 흐름이 이 숫자와 계산 위주로 흘러가고 눈에 보이는 수치에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나에게 다시 애플워치가 생겼다.

마침 애플워치를 안 쓰고 집에 처박아놓고 있는 고마운 지인이 있어서 '그럴 거면 나한테 줘라.'라고 해서 생긴 개이득템.

숫자들이 다시 내 손목을 감싸게 되었지만, 예전보다 이 수치에 크게 신경을 쓰거나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알림도 최소한으로 설정했다.

굳이 탈기계를 한다거나 좋은 아이템을 거부하고 싶지는 않지만, 신체적 활동을 포함한 모든 생활의 주체는 숫자가 아니라 나 자신 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확고해졌다고나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젊었을 때로 돌아가고 싶냐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