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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원의 초고들 Mar 16. 2024

아마 진순이나 덕순이 됐겠지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는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그리고 새해를 맞아, 다 함께 떡국을 먹고 나서 그 일을 시도했다. 일요일 오전 열한 시 아침 겸 점심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그릇을 치웠을 때였다. 나는 닦은 그릇을 털어 건조대에 올리고 다시 식탁에 앉았다. 아버지도 밥을 다 먹었지만 바로 소파로 향하지 않았고, 커피 내려 마실 준비를 했다.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 두 가지를 던졌다.


첫 번째는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두 번째는 내가 돌림자를 썼다면 어떤 이름을 가졌을지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유명한 보해 소주 보부상이었고, 목포에서부터 북한까지 돌아다니며 소주를 팔았다고 했다. “그래서 너네 막내삼촌 이름이 보해야” 아버지는 필터를 지나 내려온 커피가 채워진 잔을 들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물려 받을 돌림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순(淳), 아마 진순이나 덕순이 됐겠지”. 하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원래라면 내 이름이 김진순이었을 수 있던 것처럼, 원래라면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와 같이 살던 그 넓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누가 좋지 않은 일은 다 함께 손잡고 온다고 했었나. 20년 전, 우리와 같이 살던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경제 상황은 바닥 쳤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긴 공백은 우리 가족과 친척들 사이에 끼어 커다란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20년이 흐를 동안 친척들과 단어 하나 섞지 않았다.


화장장에서 유일하게 따뜻했던 화장로 속 불꽃은 사라졌지만, 고모들의 울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뼈는 가루가 되었고, 유골함 속으로 홀로 조용히 들어갔다. 그리고 유골함이 정사각형의 안치단에 들어가고 그 유리문이 꽉 닫혔을 때, 고모들의 울음은 분노로 변했다. 그 분노는 화장장에서 보았던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고, 땅에 남아 우리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잘 모시지 못해서 그래” 할아버지는 90세까지 사셨고, 누군가 장례식에서 호상이라는 얘기를 했지만 그 이야기는 봉안당에서 틀린 말이었다. 고모들의 분노는 사라질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더 커졌다.


그때, 할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던 병원에서부터 발인, 입관 그리고 화장까지 … 모든 절차 속에서 눈이 붉어져도 눈물 한 방울은 커녕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던 아버지가 고함쳤다. 자신의 아내에게 그만 화를 내라고, 아내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고, 우리가 무슨 잘못이냐고, 너희들 도움 없이 이제까지 잘만 모시고 살아왔다고. 아버지는 돈이 문제냐며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 땅바닥에 던졌고, 할아버지와 같이 살던 우리집도 가져가라는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고모와 삼촌들을 등진 채 “호적에서 파”라는 말을 뱉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언제 어떻게 대전에 도착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외할머니가 쓰던 작은 방에 어머니, 나 그리고 내 동생이 들어와 있었다. 봉안당에서 그 일이 있고 나서 이틀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작은 방에 세 명이 앉아있으니, 할아버지가 안치단에서 느낄 비좁음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안치단에 유골함을 올리기까지 천천히 진행되던 장례 절차와는 다르게 대전에서의 전학 절차는 빠르게 마무리 됐다. 그리고 나는 직사각형 창문이 걸린 새로운 교실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원래라면 다니던 학교에서 전교 회장 선거를 위해 공약을 준비했을 시기였다. 그런데 나는 공약이 아닌, 처음 보게 될 친구들을 위해 자기소개와 특기를 준비했다. 준비한 특기는 랩이었다. 아마 막내 이모의 영향이었던 거 같다. 이모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퍼프대디부터 드렁큰타이거까지에 이르는 다양한 힙합 음악을 들려줬다. 그렇게 나는 힙합을 좋아하게 됐다. 특히 전학을 오기 1년 전 이모는 나에게 에미넴의 세 번째 앨범인 <The Eminem Show>를 들어보라며 시디를 빌려줬다. 그때 이모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인정받는 “백인” 래퍼라고 그를 소개했다. 그 백인 래퍼의 랩에는 분노가 가득 차있었다.


아마 이모는 1년 전 에미넴을 소개해 줄 때, 내가 에미넴에게 도움받을 줄은 몰랐을 테다. 하지만 나는 에미넴처럼, 새로운 교실에서 대전인 사이 유일한 외지인으로서 이름 모를 인정을 위해 랩을 했다. 그렇다고 <The Eminem Show>의 17번 트랙 Till I Collapse나 18번 트랙 My Dad’s Gone Crazy 같은 걸 부르지는 않았고, 나는 은지원의 <만취 인 멜로디>를 따라 불렀다. 교실 안 새로운 친구들은 저게 뭔가 싶었을 테지만, 그들은 곧 담임 선생님의 말에 따라 박수를 쳐줬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경기도 내 초등학생이었던, 그리고 전교 회장을 준비하던 나는 어느새 사라졌고, 그날 이후 나는 조용히 지낼 수 없는 대전 내 초등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은 학교 복도에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친구들과 함께 비보잉을 연습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이후 아버지의 사업이 그나마 자리를 잡게 되어, 나와 동생 그리고 어머니는 다시 경기도로 올라가게 되었다. 할머니와 외삼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도착한 집은 반지하에 위치했었다. 크기는 이전에 할아버지와 살던 집보다는 좁지만, 할머니의 방보다는 넓었다. 새로 가게 될 학교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그곳에서 나는 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또 다른, 조용하지만 랩을 하는 학생이 되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서울로 대학교를 다닐 때에는 힙합동아리부터 찾아다녔다. 


지금은 어머니가 원했던, 우리 가족이 할아버지와 같이 살던 아파트만 한 집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힙합을 좋아하고, 랩을 하며 살 줄 알았던 나는 사라졌고, 지금의 나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원래라면 어쩌고저쩌고 했을 일들’은 무겁게 굴러가는 시간에 눌려 납작해졌고, 잊혀졌다. 그렇게 잊혀진 덕분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한 가지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고모들을 만나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일이었다. 전화번호는 없지만, 카카오톡 친구로 추가되어 있는 고모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제삿날이 언제인지 여쭈었다. 날짜는 2월 초였고, 제사 시간에 맞춰 시골에 도착했다.


20년 만에 뵌 고모들은 이전 그대로의 겉모습을 갖고 있었지만, 성격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분노를 머금고 있던 그들은 단어 하나 뱉는 데 최소한의 힘을 사용하려는 것처럼 모든 단어를 부드럽게 뱉었다. 그런 단어 중 ‘강아지’라는 호칭은 서른이 넘은 나에게 맞지 않았지만, 듣기에는 좋았다. 나는 강아지처럼 고모들을 뒤 따라다니며 제사 준비를 도와 준비를 마쳤다. 원래라면 죽을 때까지 고모들과 연락하지 않았을 거 같았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진순이 아닌 진원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고모들 옆에서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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