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청춘도 시드니와 함께

3.5 CBD - Cenrtral Business Districe

by 시드니 이작가

1642년 아벨 타즈만(Abel Tasman, 1603-1659)은 네델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있던 인도네시아와 가까운 파푸아뉴기니, 뉴질랜드 그리고 타즈마니아 섬을 유럽인 최초로 발견하였다. 하지만 향신료와 금이 없었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떠나게 된다. 대신 타즈만의 고향, 네덜란드 질란트(Zealant)에서 새로운 질란트란 의미로 뉴질란트로 불렀고, 영국식으로 뉴질랜드(New Zealand)로 국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호주 최남단의 섬 타즈마니아와 시드니 앞바다가 타즈만 해에 여전히 남아있다.


그 후 제임스 쿡(James Cook, 11728-1779)이 1770년 4월 상상속에만 호주대륙의 동부해안 시드니에 도착하여 영국의 식민지로 선포하였다. 제임스 쿡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성실했고, 인간적인 카리스마가 있는 리더였다. 그래서 콜럼버스, 마젤란에게는 없는 캡틴이라는 호칭을 훈장처럼 달고있다.


대항해시대 패권이 스페인, 네델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넘어오면서 지구가 자전을 하니 균형을 잡으려면 북쪽의 유라시아 대륙처럼 남쪽에도 큰 대륙, 테라 오스트랄리스(Tetrra Australis)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쿡이 1768년 엔데버호 (Endeavor)을 타고 2년 11개월 동안 뉴질랜드와 처음으로 호주의 동부해안을 탐사하며 귀환했다. 반지의 제왕의 촬영지인 뉴질랜드 남섬의 마운틴 쿡(Mountain Cook, 3717m), 호주 QLD의 Town 1770, 캐언즈 북쪽 쿡타운에 엔데버 강 모두가 캡틴 쿡의 흔적이다.


다시 2차 항해의 임무를 위해 뉴질랜드에서 남쪽으로 가서 남극을 탐사하려 했으나 여기저기 떠다니는 빙산들과 극심한 추위를 경험한다. 또 금도 없고 북극곰 같은 생명체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돌아가면서 쿡제도의 섬들 타이티, 퉁가 및 샌드위치 제도의 하와이를 발견하고 3년 만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쿡의 항해술과 인자한 리더십으로 2번의 항해가 성공적이었고 결국 유럽 사람들은 부드러운 바람과 따뜻한 햇빛이 있는 땅으로 불렀고 남태평양의 세계지도가 완성이 되었다.


아쉽게도 쿡이 같은 항로로 3차 향해 때 영국으로 돌아가는 중에 하와이에서 죽게 된다. 원주민들은 처음엔 하얀 피부의 영국인을 신이 보냈다고 여겨 음식을 나누며 항해도 도와주는 등 신성시하였지만 술을 먹고 원주민 여인을 추행하는 추태를 부리자 전쟁이 일어난다. 그들의 풍습대로 살을 도려내고 뼈만 취했다고 하니 영웅의 말로가 참 비참하기는 하다.


여하튼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도시빈민과 죄수들이 많았고 곧 독립을 앞둔 미국과 전쟁으로 더이상 죄수를 미국으로 보낼수 없게 되자 호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당시 내무부장관인 시드니 경(Lord Sydney)이 승인을 하엿고 1788 넌 1대 총독 아서 필립(Arthur Philip)이 11척의 배에 1,000여 명의 죄수와 이민자를 시드니에 정착하여 죄수의 나라, 이민자의 나라로 호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1월 26일은 오스트렐이안 데이(Australian Day)로 국경일인데 철저히 침략자 영국의 시각이다. 원래 5만여전부터 살던 원주민인 애보리진(Aborigin)들은 자연에 속한 땅은 개인이 소유할수 없다고 생각했고 모두가 주인이니 사고팔수도 없는것이였다. 졸지에 살던 땅까지 빼앗기고 전염병으로 총칼에 죽어나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NSW(New South Wales) 새로운 남쪽에 있는 웨일스는 시드니를 중심으로 개척을 시작하여 5대 총독 라클란 맥콰리(Lachlan Macquarie, 1762-1824)에 와서는 제2의 CBD인 파라마타(Parramatta)로 연결하는 파라마타 로드를 비롯하여 도로, 병원, 관공서등 인프라 공사를 지으며 기틀을 마련한다. 그래서 맥콰리는 호주의 아버지라 불리며 그의 이름을 따라서 호주의 금융회사 맥콰리 그룹이 한국에는 영종도 고속도로, 메트로 9호선처럼 전세계 인프라에 투자를 많이 하기도한다.


정착초기 농업기술도 없는 죄수들이 빵 훔쳐서 7년형 받고 부모 떠나 머얼리 남태평양바다를 보며 먹을것도 없이 힘들게 살았다. 그러다가 1850년대에는 금광이 발견되어 본격적인 골드러시(Gold Rush)가 시작된다. 돈이 도니 경제가 발전하게 되었고, 유럽에서 자발적인 이민자들이 더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산업하자 NSW 주부터 VIC, QLD 차례대로 영국으로부터 평화롭게 독립을 하고 영연방 국가로 남게 된다.


1901년 국방과 안보 대해서는 연방(Federation)의 필요함을 공감하게 되었고 수도를 캔버라(Canberra)로 하고 국명은 Commonwealth of Australia, 여왕의 총독이 통치하는 입헌군주제의 나라로 세계사에 등장한다. 동시에 중국계의 이민을 제한하고 나아가 유색 인종의 이민을 제한하며 1901년 백호주의라는 법으로 제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곧 전세계를 뒤흔든 전쟁이 평화로운 호주에서 형님의 나라 영국의 권유로 참전하여 1,2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형제의 죽음을 인구가 급감하고 아시아 국가들과 무역을 통한 경제활성화와 인구증가 라라는 이유로 결국 1973년에 법이 폐지되었다.


한국인이 호주에 살기 시작한것도 이때쯤부터이다.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하에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30만 명의 군인 -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를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74년부터 전쟁터에서 호주의 건설붐으로 일자리가 많다는 소식을 들은 참전군인 1,000여 명 정도가 관광비자로 호주에 들어온 것이 최초의 한국 이민역사의 시작이다.


사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도 1973년에 완공 이후에 도시에는 건설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용접, 타일, 페인팅처럼 비교적 영어는 필요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면 목돈을 모을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았다. 호주야 흔히 막일, 건설 노동자들에 대한 시급과 대우가 좋은 나라이다.


물론 관광비자로 일하고 돈을 버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관광 비자가 만료되어도 귀국하지 않고 불법 체류하며 노동일을 계속하다가 1976년 존 말콤 프레이저 총리(자유당)가 음지에 있는 불법체류자들을 양지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일정기간 호주에 체류한 사람들에게 영주권을 주는 사면령이 을 발표한다. 그래서 불법 체류 신분이던 교민들이 영주권을 받고 합법적으로 호주에 정착하기 시작되었다.


그래서 1976년 1,450명이던 한인들이 가족들을 데려오기 시작했고 10년 뒤인 1986년에는 9,285명으로 증가하였고, 또 10년 뒤 1997년 IMF로 추웠던 겨울엔 기술을 가진 젊은 엔지니어, 대졸자들을 중심으로 이민이 계속 늘었고 이어서 유학생, 워킹홀리데이 같은 학생들이 이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2020년 현재 호주 전역에 15만 명의 한국 교민이 있는데 그중 10만 명 정도는 시드니에 거주를 하고 있다.


교민들의 직업별로 보면 이민 1세대들은 80년대에는 기술 중심으로 타일, 용접, 페이팅, 청소 용역들이 주로 이루었고 이민 1세대의 자녀들, 즉 2세대들은 호주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한국에서 대졸자, 유학생들이 많이 오면서 회계사, 간호사, 의사 등 전문직종으로도 다양하게 되었다. 지금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는 의사, 간호사, IT 등 호주의 부족 직업군에 대해서는 기술이민이라 하여 나이, 경력, 영어 등을 점수화하여 신청할 수도 있고, 사람이 부족한 지방으로 거주하면 가산점을 주는 지방 기술이민정책도 있다. 물론 요즘 호주도 경기가 좋지 않아 내가 영주권, 시민권을 받던 2000년대 초만큼 쉽지는 않다.


이민 1세대들은 캠시(Campsie)에 모여 살기 시작해서 이제는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 이스트우드(Eastwood), 채스우드(Chatswood) 같은 동네에 한인들이 많이 산다. 비단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이민자들은 동포들이 모여 살아야 식당, 식품점에 쉽게 갈 수 있고 혹 일자리 구할 때, 친구 만나기도 쉬어 자연스레 모여 살게 된다.


나 역시도 2003년 골드코스트에 유학생으로 왔을 때는, 영어공부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한국 사람들을 멀리 했었다. 한 일 년은 그렇게 지내다가 우연히 알게 된 한인교회를 갔더니 예배 끝나고 같이 비빔밥을 해 먹고 남은 김치, 나물, 반찬을 챙겨주시니 얼마나 맛있고 고맙던지 그때부터 교회 오빠가 되었다. 이제는 오빠가 아니라 아저씨가 되었고 그렇게 청춘이 지나가고 후반전을 준비해야되는 타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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