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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이작가 Jan 02. 2023

추모의 글

장인어른 

동물의 울음소리처럼 어린아이가 목청 터지게 우는 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 한 시였고, 옆집에서 나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방문을 열고 나오니 불행히도 우리 집이었고 아내가 휴대폰을 붙잡고 주저앉아서 오열하고 있었다. 부모를 잃은 새끼의 슬픔은 목이 찢어질 듯 숨을 헐떡거리며 통곡하여 보는 이도 정신이 혼백이 되어 부둥켜 앉고 울도리밖에 없었다.  


밤늦게 한국에서 카톡전화가 오면 혹시나 싶어서 항상 긴장하기도 하지만 친정식구들이 얼마 전에 코로나에 걸렸다는 소식에 직감하였다. 장인어른이 위독하시다고 한다. 병원에서 산소호흡기를 달지 말지를 결정해야 된다고 하고 90대 중반이어서 다시 의식회북 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얘기했다. 


지방에 있는 형제들이 병원으로 모여들었고 그 시간 아내도 시드니에서 서울 가는 제일 빠른 비행기표를 구매하였다. 나는 한두 시간이라도 자려고 누웠고 아내는 잠을 잤는지 울었는지 내가 알람소리에 일어났을 때는 이미 짐을 다 싸놓고 초조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공항으로 가는 30여 분동 안 장인어른 생각이 나서 눈물이 자꾸 흘러넘친다. 처음 아내의 친정에 인사 갔을 때, 칠 남매의 형제들이 다 모여서 큰상에 첫 대면하는 사위를 위한 음식을 펼쳐놓고 앉아 있으니 조금한 집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때가 5년 전쯤이고 코로나 전까지 두어 번 한국에 있다가 시드니로 돌아올 때면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곤 했다. 혹시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들어서 아직 건강하시고 걸음도 잘 걸으시는데 혼자 방정맞은 생각에 큰절을 할 때마다 울었다. 

코로나가 끝나고 작년에 한국에 있을 때 경주에서 미루었던 우리의 결혼식을 했다. 다들 한복을 맞춰 입고 친척, 친구 없이 직계가족만 참석하는 조금 한 결혼식을 계획했으나 칠 남매다 보니 직계가족만 불러도 30명이나 된다. 노래하고 춤추고 사진 찍고 시끌벅적하고 재미난 가족들의 축제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숙소도 경주 황룡원에 잡아서 밤에는 첨성대도 가고 낮에는 불국사도 가고 다들 몇십 년 만에 온 경주를 제대로 여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침에 문제가 생겼다. 장인어른이 사라졌다. 밤에 다들 늦게까지 마루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얘기하고 늦게 자서 늦잠을 즐기고 있었는데 호텔 내에 걷던 장인어른이 보이지도 않고 돌아오시지도 않으신다. 


처음에는 잠시 있다가 오시겠지 싶었는데, 약간 치매가 있으신 장인어른이 한 시간, 두 시간이 식사 때가 지나도 안 와서 우린 다들 경찰서에 실종신고도 하고 경주 보문단지를 여러 차로 나누어서 서로 연락을 해가면서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심지어 슬슬 비가 오기 시작한다. 어디 미끌려서 쓰러지신 것은 아닌지 그래서 이렇게 찾아다녀도 안 보이는 것인지 걱정이 불안이 되고 아내는 울기시작한다.


결국은 점심때서가 되어서야 경찰이 CCTV를 확인했고 장인어른의 행방을 찾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다들 땀과 비에 젖었지만 5시간 만에 아버님을 찾아서 다들 긍정모드로로 전환되어 경주를 보물찾기 하듯이 뛰어다는 것을 아버님의 선물로 생각하기로 했다.  

  


7남매 중에서 6번째이고 네 딸 중에 막내였던 아내는 장인어른에게 장난치고 친구처럼 구는 귀여운 막내딸이었다. 아내는 목요일 밤늦게 친정에 도착했고 장인어른은 이미 돌아가셨고, 금요일 아침 장인어른은 깨끗하게 몸단장을 하고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입관하셨다. 떠나는 것은 슬프지만 평안하게 고생 안 하시고 돌아가셔서 다행이라고 했다. 장례식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가족들을 위로하였다. 특히 장인어른과 함께 살던 둘째 형님이 많이 울었다고 한다. 


장인어른, 신옥균 님은 부유한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공무원을 시작하셨다. 지리산 천왕봉의 비석,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된다."는 장인어른 재임시절 헬기로 진행했던 사업 중 하나였고, 아내의 기억 속 장인어른은 시골에서 농사도 짓지 않고 항상 흰 와이셔츠, 정장 아니면 가죽재킷을 입고 다니시는 깔끔쟁이, 멋쟁이여서 친구들이 "지연이 아빠 너무 잘생겼다."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종종 장인어른 젊을 때 모습이랑 나랑 닮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아내에게 내가 친숙하고 더 매력적으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외국에 살다 보면 한국에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함께 하지 못하는 슬픔이 너무 크다. 그래도 아내는 형제들과 울고 웃으며 아버님을 잘 보내드렸다고 한다. 어제는 연말에는 가족들이 다 모여서 추모 회를 먹고, 연초에는 떡국에 밤에는 추모 치킨을 먹으며 아버님의 빈자리를 함께 채웠다고 한다. 


항상 웃음으로 슬픔을 극복하는 가족들의 보며 힘이 나기도 하고 나는 글로써 추모를 합니다. 
아버님 이제 편안한 곳에서 저희들 잘 사는 거 지켜보면서 편히 쉬세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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