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참 좋겠다

무심코 지나갈 수 없었던 엄마의 한 마디

by NAIN


#손톱달이 찾아오면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드문드문 손톱달이 찾아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을 되짚어 봅니다.


하루는 아침운동을 다녀와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자 엄마가 말했다.



넌 참 좋겠다.



무슨 의미일까?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와 정신없는 아침이었다. 거기다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게 처음이라 도무지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어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좋아 보이냐고 반문했다. 그다음 대답은 고민을 더 가중시켰다.



항상 즐거워서.



그 순간 엄마의 묘한 표정과 말투에서 어쩐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당시에는 그냥 '인간의 삶엔 다 희로애락이 있는 거야!'라며 상황을 모면해 버렸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도 정말 많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몸 전체를 감쌌다. 그래서 사실 장난스럽게라도 그 대화를 회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회피의 가장 큰 이유는 역으로 최근 들어 내가 엄마의 삶을 부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서툰 것이 많고 여전히 부모님의 손길 아래에 있지만, 나와 동생은 어느덧 성인이 되어 먹고 살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자 점차 엄마의 삶에 여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땐 엄마만큼 아끼며 사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전보다 본인을 위해 하는 소비가 많아졌고 해외여행도 제법 다니기 시작하셨다. 요즘엔 동네 독서모임을 나가신다고 하시더니 이젠 유화까지 배우고 계신다. 벌써 집안 곳곳에 엄마의 그림이 놓여있다.


엄마가 처음 그림을 들고 왔을 때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니 엄마가 무얼 하면서 그리 행복해하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무미건조한 반응이 일상다반사라 참 감정이 풍부하지 못하고 호불호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본인이 그린 그림을 자랑하고, 수업에서 받은 칭찬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니 낯설었다.


엄마는 반평생을 나와 살았고, 나는 내 평생을 엄마와 함께 살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모르는 게 참 많다. 어쨌든 이것저것 즐기기 시작한 엄마의 삶을 보며 참 다행이란 생각도 들며, 나도 훗날 여유로운 중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란 상상을 하던 찰나였다.


지금에야 생각하건대 ‘넌 참 좋겠다.’란 말에 ‘엄마도 참 좋아 보여.’라는 대답을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그날 하루는 엄마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그리고 그 상황을 모면했던 또 다른 이유는 양심이 찔렸기 때문이다. 엄마 말 대로 나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란 걸 안다. 감사하게도 학비 등에 있어 돈 걱정을 크게 해 본 적이 없어, 전공이나 훗날 직업을 선택할 때 돈 보다도 내 행복이 우선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항상 선택의 자유를 주셨던 덕분에 인생의 중심에 오롯이 나를 세우고 내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결국 지금의 행복이 온전히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는 거다. 내 옆엔 항상 조그마한 핏덩어리가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지켜봐 주신 부모님이 계셨다. 그래서 엄마의 부러움이 담긴 말투와 이제라도 얻게 된 늦은 즐거움이 미안했던 거다. 엄마는 원래 컴퓨터 선생님이었는데, 결혼을 하면서 일을 그만두셨다. 아빠는 탐험가라는 꿈이 있었지만, 반평생을 직장인으로 보내시고 이제야 조금 쉬고 계신다.


지금 내 나이에 두 분이 가정을 꾸리셨다니. 같은 나이가 되어보니 그 당시 부모님이 포기했던 게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었는지 더 체감이 된다. 그리고 그 이유 중 하나에 내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참 감사하면서도 마음 한켠에 멍울이 생긴다. 만약 그들이 인생의 가장 큰 기준점에 자신을 놓았더라면 어땠을까. 혹여나 진작 찾아왔어야 할 그들의 행복을 지금의 내가 대신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어쨌거나 이 또한 그들의 선택이었으니, 나의 몫은 그저 그 선택이 헛되지 않도록 또 다른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면서 엄마와 점점 멀어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엄마에게서 내 미래를 보고 나에게서 엄마의 과거를 보게 되었다. 살아갈수록 세상이 모순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다. 그럼에도 더 잘 살아보려고 한다. 이게 엄마가 내게 준 세상이고, 또 선물일 테니 말이다. 언젠간 내가 먼저 말하고 싶다.



엄마는 참 좋겠다.


그리고 나지막이 덧붙여야지. '내가 엄마 딸이라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