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아빠 왔다!"
현관문이 열리며 나는 명쾌한 소리다. 하지만 유년기 시절 나는 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버지가 해외에서 십수 년 간 일하셨기 때문이다. 몇 개월마다 한번 휴가를 받아 들어오시긴 했으나, 중요한 순간에는 늘 함께 하지 못했다. 생일에도, 졸업식에도 우리 가족은 비대면으로 함께 했다. 비대면 시대를 앞서 갔던 가족인 셈이다. 당시에는 서운함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년, 아버지가 해외 근무를 마무리하고 완전히 돌아오셨다. 가끔 휴가를 나오시긴 했자만, 어쨌든 아버지를 제외하고 세 사람이 살던 집이었다. 그런 공간에 넷이 있으니 집이 가득 찬 기분이 들었다. 가족 구성원에서 한 명의 존재감이 그만큼 크나큰 것이었다. 셋에 익숙했는데, 넷이 매일을 함께 살게 되었으니 가득하다 못해 복작복작한 느낌이었다.
좋지 않냐고? 물론 처음엔 좋았다. 그간 고생하신 아버지의 노고를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복귀하시는 날에는 상여금으로 받은 돈을 꽃이 담긴 용돈 박스에 넣어 선물해드렸다. 세상 밝게 웃으며 용돈 박스에 뽀뽀세례를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아버지가 웃으니 나도 좋았다. 그런데 웬걸. 시간이 흐를수록 관계에 있어서 양적 시간의 중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휴가를 들어오셨을 때는 서로 반가운 상태이니 배려가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크게 서로 거슬릴 행동도 하지 않았고, 설사 어떤 사건이 있다 할지라도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진짜 식구가 되니 사소한 사건들도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제야 세월의 공백이 느껴졌다.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한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졸업하고 취직까지 했다. 산전수전까지는 아니라도 여러 경험과 고난을 겪으며, 그 나만의 가치관이 뚜렷이 형성되었다. 아버지는 여성 호르몬이 늘어 꽤나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몇십 년 동안 어떻게 한 회사에서 일했나 싶을 정도로, 정말 게으른 사람이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코로나 시국으로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셨으나 문화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두 달만에 백수의 길을 선택했다. 이 사태가 의미하는 것은 십 수년을 떨어져 있던 우리가, 하루 24시간 중 24시간을 부딪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직장인 딸과 백수 아빠가 하루 온종일을 한 집에 있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새 잔소리꾼이 되어 엄마의 성을 따 '미니 박'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우리는 가족인 걸. 십 수년의 공백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조금씩 맞춰가고 있다. 서로의 생활양식에 익숙해지고, 완전 남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 또한 감내하려 한다. 그래도 참을 수 없는 것은 쏟아내면서 말이다. 자영업자 엄마, 백수 아빠, 직장인 딸, 군인 아들, 이렇게 넷이 모여 서서히 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