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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un Leymet Jun 13. 2021

81년생의 첫사랑

어릴 적부터 나의 주변엔 항상 여자들만 있었다. 여중, 여고만 다닌 것도 아닌데 말이다. 미술을 했기 때문에 미술학원에 가면 또래 남자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러고 보면 친구들 중에 남자아이도 끼어 있을 법도 한데, 내 세상엔 여자 친구들만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었다. 남녀공학, 남녀합반이다. 마치 담이 걸린 것마냥, 남자아이들이 앉은 쪽으로는 고개가 돌아가질 않았다. 난 참 촌스러웠다.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보고 내 근처에서 그림을 그리던 어떤 오빠를 불러달라고 했다. '오빠'라고 누군가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너희 오빠'라면서 친구들의 오빠들에 대해서 얘기를 해본 적은 있지만 '오빠'라는 이질적 종족을 감히 불러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나보고 하지도 못하는 외국어를 해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오빠'라는 말을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몰랐다. '옵빠' 쯤으로 불렀을까? 내가 오빠라고 부르자마자 한 친구가 깔깔깔 웃었다. 기분 나쁜 웃음은 아니었다. 내 외국어 실력이 들통난 것 같아서 얼굴이 빨개지긴 했다. 나에게 남자아이들은 이렇게 외국어 같은 존재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돌 때쯤 걸음마를 떼고, 7살쯤 글을 배우는 것처럼, 고등학생 때 우리는 짝사랑을 배웠던 것 같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모여 앉아서,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는지 서로의 비밀을 조심스럽게 누설했다. 우리는 서로서로 그 마음을 소중하게 다뤄줬다. 이성을 좋아하는 마음을 이제 막 겪어보기 시작했던 우리들이었다. 초등학생이 되면 여자 아이들은 피아노를 꼭 배우고, 남자아이들은 태권도장에 꼭 다녔던 것처럼 우리들은 모두 첫사랑, 짝사랑을 싱그러운 풋내를 풍기며 하고들 있었다. 수능 시험 항목에 우리가 열심히 배운 첫사랑 문제도 있어야 했다.


나에게도 첫사랑이 찾아왔다. 아니, 탕! 소리만 울리면 언제든 짝사랑을 시작할 것처럼 출발선에 서 있던 사춘기 소녀의 마음은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말랑말랑해서 아무나 건들어도 누군가가 들어앉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이런 나의 마음에 결국 한 아이가 걸려들었다.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 머리카락이 유난히 새카만 아이 었다. 복도에서 마주쳐서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무작정 좋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 아이와 닮은 다른 아이를 보고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가 쟤였나?', '아니 쟤였나? 하고 헷갈리기도 했다. 당시 나는 그 아이를 진심으로 좋아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막연하게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었던 것도 같다.


친구들과 나는 그 아이가 지나가면 모른 척 지나쳤고 그 아이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점심시간에 그 아이는 운동장 옆 등나무가 있는 벤츠에 나가 있길 좋아했다. 덕분에 나도 친구들과 등나무 밑 벤츠에 앉아있는 것이 좋았다. 그 아이는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봄볕이 사방에서 쏟아져서 등나무 잎에 프리즘처럼 부딪혔다. 반짝이는 연둣빛 초록잎이 만들어 낸 그늘은 맑고 투명했다. 가슴이 확 트이게 만들었다. 그 아이는 은하수를 모아놓은 수많은 별과 같이 내 마음에 쏟아져 내렸다. 청량한 밤하늘의 은빛 가루처럼 한 순간도 빛을 잃지 않았다. 하얀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항상 웃고 있었다. 미소가 유난히 따듯했다. 그런 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행복했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그 아이의 맑고 환한 웃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 속에 보석처럼 박혀있다. 조용해 보였지만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리더처럼 보였지만 왠지 모두를 돌보고 있는 것처럼 세심하게 물러서 있는 듯 보였다. 그 아이를 보면 마냥 기분이 좋았다. 나에게 절절한 가슴 아픈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와 같은 반 여자 아이들은, 새가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하나씩 둥지를 만드는 것처럼 나에게 그 아이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물어다 줬다. 별에 별걸 다 가르쳐 준다고 서로 깔깔거리고 웃기도 했지만, 덕분에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아이의 생일을 알게 된 것이 그중 가장 큰 수확이었다. 친구들과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을 했다. 생일 선물을 할지 말지, 어떤 선물이 좋을지, 선물을 줄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좋아한다고 고백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나뿐 아니라 친구들 모두에게도 행복한 고민이었다. 설레어 사방으로 통통 튀어 다니는 마음을 서로 붙잡아 주느라 깔깔깔 거리던 재미있는 시간들이었다. 사춘기 소녀의 짝사랑은 단짝 친구들과 함께 나눌 사소한 비밀들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아니, 나는 너무 과하지 않기로 했다. 작은 하얀색 크림 케이크와 가방에 걸고 다닐 수 있는 아주 작은 인형을 준비했다. 가방에 인형을 달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던 때다. 친구에 친구에 친구... 몇 다리를 건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 아이를 등나무 아래로 몇 번째 쉬는 시간에 나오도록 말을 전했다. 나와 친구들은 호들갑이었고, 별것도 아닌 계획을 가지고 다다닥 숨 가쁘게 움직이며 007 작전을 펴듯 두 팀으로 나눠서 발 빠르게 등나무로 향했다.


"나 너 좋아하는데 우리 친구 하자."


사랑이 뭔지 몰랐던 나는 이 말을 하는 것이 별로 부끄럽거나 창피한 것일 줄 몰랐다. 나는 내성적이고 아주 평범한 아이였지만 첫사랑도 짝사랑도 해본 적 없는, 무작정 대담한 어린이 청소년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친구가 될 테고 그러면 내 친구들과 놀듯이 그 아이와도 함께 놀면 되는 건 줄로 알았던 것 같다. 그 아이는 친절했고, 여전히 등나무 아래의 반짝이는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10분짜리 쉬는 시간 1분 1초가 빠지지 않고 즐거웠다. 투박한 나의 마음이라도 떨리긴 했다. 그렇지만 수업시간에 앞에 나와서 발표를 하라고 할 때도 그만큼은 떨렸다.


그날부터 우리는 복도에서 마주치면 '안녕'하고 인사를 했다. '안녕' 말고는 나눠본 대화가 없었지만 열심히 '안녕'을 했다. 조금 더 어렸을 때 '남자 셋, 여자 셋'이라는 시트콤에서 항상 '안녕'만 해서 '안녕맨'이라고 불리는 캐릭터가 있었는데, 친구들은 나를 '안녕걸'이라고 불렀다. 오늘도 '안녕'을 했는지, 몇 번 했는지가 너무나 중요했다. 내가 생일 선물로 준 인형이 그 아이의 가방에 달려 있던 것을 봤을 때 나와 친구들은 환호를 질렀다.


친구들이 물어다 주던 그 아이에 대한 정보도, 소식도 이제 동이 났다. 우리는 서로 '안녕'만 말할 줄 알았고, 시간은 흘렀다. 하루는 친구들과 방과 후에 늦게 남았다.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토요일 아침에 수업이 있던 시절이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은 모두 학교를 빠져나가기 바빴다. 나와 친구들은 텅 빈 학교에 남아서 그 아이의 교실에 들어갔다. 그 아이의 책상에 앉아서 서랍에 있던 달랑 몇 권의 책을 소중하게 꺼내어 하나하나 펼쳐봤다. 교과서 여기저기 낙서가 있었다. 낙서가 많은 걸로 봐서는 수업 시간에 그리 집중을 하지 않나 보다고 우리끼리 결론을 졌다. 뭐라고 뭐라고 적은 게 시 같기도 했고 노랫말 같기도 했다. 낭만적인 아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본어로 적어놓은 것도 있었다. 일본어 반이 없었는데 일본어를 써놓은 그 아이가 멋지게 느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의 헤비메탈 그룹 X-Japan의 대단한 팬이었다.


1년쯤 지났을까? 마음에 먹먹한 구름 한 점 없이 해맑은 짝사랑을 매일의 루틴처럼 하고 있던 중, 그 아이가 사귀자고 고백을 했다. 매일마다 '안녕'을 하다 보니 조금씩 내가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단다. 심쿵한 고백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진심처럼 느껴지기는 했다. 사귀기로는 했는데 그 아이도 나도 사귀는 게 뭔지 모르는 숙맥이었다. 청바지가 망가져서 A/S를 맡겨야 한다면서 하루는 청바지를 산 백화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나보고 같이 가자고 했다. 학교 근처에서 만나서 함께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지나 있는 백화점에 도착했다. 청바지를 점원에게 맡기고 돌아서서 다시 버스를 타고 백화점에 갈 때 버스를 탔던 자리에서 내렸다. 우리는 잘 가라고 인사하고 각자 헤어져 집으로 갔던 것 같다. 집 근처까지 바래다줬던 것 같기도 한데,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던 때라서 기억이 흐리다.


그 아이는 나만큼 순진했다. 밴츠에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서 나에게 재밌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 주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아이와 함께일 때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아이의 말을 항상 듣고만 있었다. 나를 대하는 마음에서 그 아이의 진심과 정성이 느껴졌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매너도 좋았던 것 같다. 쑥스러워서 얼떨결에 매너가 좋았던 것인지, 숙맥이라서 어물쩡거리다가 매너남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놀이터 밴츠에 앉아서 잠깐 얘기를 나누곤 했다. 당시 중고등학교 앞에 한참 유행이던, 청소년들의 아지트 '팡세' 같은 체인 커피숍에 두어 번 가서 탄산음료를 마시며 얘기를 한 게 전부였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성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나를 만나줬고, 항상 웃는 모습에 밀당 같은 것을 할 줄 몰랐다. 그때는 밀당이라는 단어도 몰랐다.


걸음마 떼듯 어설프게 짝사랑을 시작해서였을까? 친구들이 하니까 나도 덩달아서 이성을 좋아하는 마음을 내본 것일까? 습관처럼 한 짝사랑이 1년이나 무미건조하게 지나간 탓일까? 사귀기로 한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아서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에게 '안녕'이라고 인사를 하지 않았고, 일방적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정리랄 것도 없었다. 사귀던 사람들이 더 이상 그만 사귀려면 어떻게 하는 건지 몰랐다. 우리는 서툴렀고, 서로 절절하지 않았다. 수능의 압박 속에서 어느새 우리는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지 실은 잘 모르겠다. 그 마음을 알아차릴 만큼 나는 성숙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그 아이에게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길 바랬다. 시간이 지날수록, 혹시나 내가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다. 교복을 입고 등나무 아래에서 봄 햇살을 맞으며 해맑게 웃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소중하게 마음에 담고 있는 것으로 미안함을 대신하고 싶었다. 나에게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고, 1년 동안 나의 다이어리를 가득 메운 아이였다. 나의 인생에서 소중한 기억과 추억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이이다. 영문도 모르고 나와 이별한 그 아이에게 항상 마음이 걸렸다. 그 아이에게 아름다운 첫사랑과 짝사랑이 따로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냥 '아참, 나에게 고백했던 애가 있었지!'하고 우연히 생각나는 그런 정도의 존재이길 바란다. 나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준 그 아이에게도 소중한 추억이 분명 따로 있기를 바란다. 나와 함께한 짧은 시간이 그 아이의 첫 추억을 가슴 아픈 것으로 만들어놓지 않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 글을 열여덟 살에 적었더라면 나의 글이 혹시라도 가슴 쥐어짜게 하는 눈물 나는 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다면 1년이나 짝사랑을 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40대 애엄마가 되어 그때를 회상하며 적은 글은 참 건조하다. 소중한 그때의 마음이 어린애 장난처럼 무참하게 시시하게 써진 것 같아서 조금 서운하기도 하다.


아쉽게도 누군가가 '네가 첫사랑이야'라는 고백을 받아 본 적도 없고, 나를 짝사랑하는구나 하고 티가 나게 나를 좋아하던 아이도 없었다. 인기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나였다. 그런 나에게도 내 마음을 앗아갔던 첫사랑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 아이에게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의 첫사랑에서 풋내도 내보지 못하고 익어버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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