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마지막 연애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재밌는 분 같으니까 한 번만 더 보고 거절해야지,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사람은 세 번은 보라고 하니까 한 번만 더 보고 거절해야지, 세 번째 만났을 때는 내 손을 불쑥 잡는 그의 손을 뿌리칠 수 없어서 일단 만나 볼까 하다가,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렇게 힘들어 놓고 이제야 숨통이 트일 만 한데 또 연애를 시작했니. 나는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법 혼자 있는 시간들을 알뜰살뜰히 잘 즐겼으니 연애를 하더라도 잘하겠거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누군가가 마음속에 들어오니 또다시 내 일상에서 차지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누군가를 궁금해하고 알아가고, 그래서 설레고 불안한 이 감정이 이제 나에겐 불편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낀다. 앞으로 함께 나눌 순간에서 오게 될 행복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내가 그에게 줄 수도 그가 내게 줄지도 모르는 상처에 대한 걱정의 크기가 더 크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나를 염려하는 사람, 나에게 다정한 사람, 나의 존재에 고마워하는 사람. 그 존재가 꼭 이성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은연중에 딱 한 명의 연인이 나타나길 기대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서로에게 딱 한 명의 연인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 나도 그를 모르고 그도 나를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 몇 년 후의 내가 즐기고 있거나 회상할 순간이 궁금해진다.
지금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에 잠깐의 만남을 가졌던 친구 A가 있었다. 내가 먼저 다가갔지만 내가 먼저 손을 놓았다. 우리의 마지막 연락에서 A는 나에게 '너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숙제가 되고 싶지 않아'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그가 자신을 '숙제'라고 표현했다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났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무해한 사람은 절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내가 그에게 먼저 다가갔더라도 누구 하나가 서로 맞지 않다고 여긴다면 끝낼 수 있는 게 관계라고 생각했다. 해서 나의 거절에 미안함은 내포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름의 최선에도 A는 상처를 받았다. 나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의 안녕을 진심으로 빌어 주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지금 남자친구를 만났을 때 문득 A 가 했던 말이 떠오르며 갑자기 화가 났다.
'너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사랑은 결핍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낭만이 없는 사람은 낭만이 있는 사람에게 끌리고, 취향이 없는 사람은 취향이 있는 사람에게 끌린다.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차분히 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끌리고, 말을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재밌게 말을 하는 사람에게 끌린다. 불안정한 사람은 안정감 있는 사람에게 끌리고, 안정적인 사람은 불안정하더라도 도전하는 사람에게 끌린다. 그런데 만나지 얼마 되지 않은 A는 무슨 수로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걸까. A와 만나면서 그가 만날 때마다 털어놓았던 말들로 인해 그의 결핍은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 결핍은 내가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나의 결핍은 A가 채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어떤 결핍의 상태를 겪고 있는지 그가 물어본 적이 있던가.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내 결핍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만나는 동안 그는 그의 결핍을 나에게 전달하는데만 집중했고, 그 결핍이 나로 하여금 채워지길 원했다. 이런데도 어떻게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거지.
사랑이 시작되면서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 상대의 말에 이제 더 이상 기대가 없다. 나의 겉모습만 보고 평생을 약속하며 주말에 자신의 가족을 보러 가자는 남자들을 너무 많이 봤다. 이제는 '예쁘다', '뭐든 다 좋다'는 말보다 나의 결핍을 궁금해하며 나의 낭만을 지지해 주는 사람을 원한다.
해서 지금 남자친구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어쩌면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과 같은 사람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모르면서 나를 안다고 생각하고, 나를 모르면서 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고, 책임지지 못할 허황된 말들을 늘어놓는. 그러나 나의 결핍을 그는 채워줄 수 있고, 그의 결핍을 내가 채워줄 수 있기에. 누군가와 함께 할 때의 재미가 불안함을 망각할 만큼 크다는 사실을 알기에. 짧은 인생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싶은 욕심에 또 한 번 무모한 도전을 시작해 본다.
-24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