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즈더밍 Oct 27. 2020

진경이에게

가을이야. 진경아. 우리 집 단지에는 항상 단풍이 일찍 찾아와. 일조량이 좋아서인지 성질 급한 녀석들은 일찌감치 잎을 떨궜고 대부분은 짙은 노랑이나 빨강으로 변신했어. 올해는 내 시간이 많아서 자주 가을 풍경을 보고 있어. 며칠 전 가을비가 내리고 칼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가을 햇살은 따가워서 아직은 밖에서 운신하는 일이 즐거워. 나무를 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일하는 내내 부둥켜안고 살았던 것들이 너무나 보잘것없어서 허망한 마음이 들기도 해. 동시에 지금이라도 진짜 중요한 것들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는데 사실은 전부 다 정답이기도 오답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하하.

지난밤 광주에 있는 큰절의 법회에서 주지스님이 가을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어. 가을이 되면 모두들 단풍 구경을 부지런히 다니고 울긋불긋한 나무들을 찬양하는데 스님은 한편으로 의문이 들었데. 사실 가을의 나무들이 색이 변하고 잎을 떨구는 건 병들고 늙어서 죽어가는 일인데 왜 사람들은 그 일을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혹은 반대로 자연의 죽음은 부러 찾아가 즐기면서 왜 인간의 죽음은 자꾸만 감춰지고 방구석으로 몰리고 최후에는 하나의 처리 공정으로 간주되는 걸까,라고.

같은 가을을 앞에 두고 깊은 사색을 하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주변에도 멋진 어른이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어. 너무 드물어서, 너무 귀해서 탈이지만. 어쨌든 먹고 싸는 일 말고의 어떤 것을 추구하고 가꿔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내게 각별한 의미야. 돈벌이로만 삶을 살아가기에는 내가 곧잘 허무에 빠져 허우적거리니까.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돼. 서른두살의 가을을 지나면서 여전히 나아지려 꿈틀거리는 내가 기특하기도 다행이기도 반갑기도 하고 그렇네.

종종 우리가 호수공원을 맥없이 계속 걷던 그 날들이 생각나. 취직이 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면서도 어떻게 살아할지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었잖아. 젊음의 고지를 찍고 늙음으로 향하는 나이가 된 우리는 이제는 만나도 시간에 쫓겨 피상적인 이야기들로 시간을 채우느라 바쁘지. 종종 안타까웠어. 너와의 깊은 대화가 그리웠으니까. 그렇지만 섭섭하지는 않아. 나이가 들면서 내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토해내는 일로 해결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적당히 내 안에서 삭히는 방법도 배웠거든. 때로는 침묵이 훨씬 더 강한 힘이 되더라고. 아마 우리 둘 다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을이 지나가기 전에 너랑 팔짱 끼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동안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으니 이야기산이 잔뜩 높아져 있을 거야. 가을산이 예쁘다고 소리 지르고, 돗자리 깔고 앉아 소주 마시며 냄새 피우는 일 말고. 우리 우아하고 조용한 대화를 나누자. 어떻게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주제로 가을바람을 느끼면서 마음에 희망을 품어보자. 내가 곧 갈게. 잘 지내고 있어!

작가의 이전글 씩씩하게 살고 싶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