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셔레이드 걸 May 02. 2023

무제.

흐린 날을 좋아한다.

빛 하늘에 먹구름이 적당히 흩뿌려져 있고 계절에 관계없이 어쩐지 서늘한 느낌이 드는.

유독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이라 평소에 하지 않는 일들을 하고는 이내 우울해진다.

그게 유일한 단점이랄까.


근데 너 정년은 언제니?


엄마가 문득 뜬금없는 소리를 다.

없는 살림에도 서울의 4년제 사립대학에 보내줬건만 어느덧 40대 중후반이 된 딸이 몇 년째 직함 하나 없는 계약직 연구원 A에 머물러 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물었다.


엄마, 나는 매년 근로계약을 하는 계약직 직원이야.

뭐야 그럼 언제 잘릴지 모르는 거네?

그런 셈이지.

아이구 어쩌냐...

다닐 수 있을 때까지 다니다가 집 근처로 경력직이든 뭐든 알아봐야지.

다 늙어서 경력직으로 어딜 가니. 큰일이다.

?


염려를 하는 건지 염불을 외는 건지 모를 대화가 이어진다.

그럼 신입으로 구직활동을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지금 직장도 애초에 육아휴직 사무보조로 들어온 곳이다.

몸 쓰는 일, 머리 쓰는 일, 마음 쓰는 일 두루두루 다 해봤으니 다 할 수 있다고, 사무직이든 용역직이든 뭐든 오케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째 당사자보다 주변이 더 야단이다.


봉지에 남은 포테이토칩의 부스러기 수준이긴 해도 매달 조금씩은 남아있던 통장 잔액이 올해 들어 내내 적자를 내고 있다.

연초에 엔진오일, 브레이크 오일, 미션 오일 3종 세트를 교체하면서 목돈이 들었는데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강아지들이 줄줄이 아프면서,

배달음식을 매일 시켜 먹으면서,

피곤하다고 택시를 타면서,

벌이에 맞지 않는 선물을 척척 보내면서

작은 레이저 같았빨간 불은 어느새 사이렌 수준으로 크고 짙어졌다.

이러다간 정말 거지꼴을 면치 못할 것 같아 덜컥 겁이 난다.

우선 배달부터 줄여야겠다.

귀찮아도 반찬을 꺼내고 소분해 얼려둔 밥을 해동시켜 먹어야겠다.


그 와중에 부모님과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노인이 되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더는 미루면 안 되겠다 싶었다.

5월 카드 결제 예정 금액을 확인하면서 살짝 망설였지만 오늘 저녁, 전에 먹고 넣어둔 사이다병의 뚜껑도 열지 못해 쩔쩔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결심했다.

아끼는 건 다른 카테고리에서.


오랜만에 들여다본 손톱이 유독 못생겼다.

손톱이 아니라 발톱처럼 보인다.

아니 발톱이 더 예쁜 것 같기도 하다.

미간에 돋은 왕뾰루지가 피식 웃는 것 같다.

아아ㅡ 나는 오늘 제법 우울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4월, 노르웨이의 숲에서 하나와 앨리스는 춤을 추었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