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수수께끼를 좋아했다.
활자를 읽게 되면서부터는 동네에 소문난 책벌레일 정도로 독서광이었고 덕분에 또래보다 어휘력이 월등했으며 이내 아버지가 보시는 한자어 그득한 세로 쓰기 신문의 크로스워드에 몰두했다.
그래서 지금도 퀴즈나 다름없는 네이버 지식인 질문에 답변을 다는 것이 취미라고 이력서에 당당히 적곤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당연히 국어시간을 가장 좋아했고 선생님이 새로 배운 단어로 짧은 글짓기 숙제를 내주면 신이 나 남들의 다섯 배는 더 많은 문장을 공책에 줄줄 써 내려갔다.
선생님은 국어시간마다 내 글짓기가 적힌 공책을 들고 읽어주셨는데 수줍음이 많던 나는 귀까지 새빨개져 고개를 푹 숙였지만 홧홧한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피어올랐다.
책을 좋아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렇기에 더더욱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작가-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 감히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생각에 쐐기를 박은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의 몇몇 초등학교에서 연합행사로 각 학교 대표 한 명씩을 뽑아 백일장을 열었다.
같은 반에 제법 글을 잘 쓴다는 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우리 둘을 불러 샘플 도서를 건네더니 이것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미션을 주셨다.
어리둥절한 나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당시에는 선생님의 말이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하던 모범생이었기에 몇 날 며칠을 고민하여 숙제를 완성시켜 제출했다.
그리고 얼마 뒤 어느 따스한 봄날 오후, 나는 반 친구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홀로 가방을 싸서 조퇴를 했다.
일이 왜 그렇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웃 학교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학교대표로 참가하게 된 거였다.
혼자 버스를 타고 갔던 낯선 학교의 어떤 교실에 아이들 몇 명이 긴장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개중엔 유명 사립학교의 교복을 입은 똘망똘망한 여자아이도 눈에 띄었다.
나도 빈자리에 앉아 필통을 꺼냈다.
칠판에 주제가 적히고 제한시간이 길지 않았기에 나는 원고지에 무언가 열심히 써 내려갔다.
아마 수능시험을 보던 순간조차 그때만큼 집중하지는 못했을 거다.
심사는 곧바로 진행됐고 딱 2명이 상을 받았다.
순박하게 생긴 남자아이가 금상, 사립학교 여자아이가 은상이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똑같은 참가상을 받았다.
나는 상장과 부상을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에 결과를 보고해야겠기에 부상의 포장지를 뜯지도 못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상장이고 뭐고 길가의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을 텐데 말이다.
선생님은 별말씀을 않으셨지만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이 내가 가져온 상과 부상을 다시 나에게 전달하는 쇼를 할 때 나는 어째서 인생에는 빨리감기 버튼이 없는지에 관한 생각으로 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교무실의 모든 선생님들이 다른 애를 내보낼 걸 그랬어.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는 짧은 글짓기를 하지 않았고 책벌레라는 말을 들으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여자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성격이 꽤 밝아진 나는 교내 백일장 대회가 열릴 때마다 나름 정성껏 글을 써내곤 했다.
물론 단 한 번도 상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늘 동경했던 동급생 친구의 수상작을 보며 감탄했을 뿐이다.
그 친구와는 고등학교에 오면서 무척 친하게 지냈는데 그 계기가 바로 문예반 면접에서였다.
그 당시 인기 동아리였던 여고 문예반에 가입하려면 1차 작문, 2차 면접, 3차 졸업생 면접을 통과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거의 대기업 공채 뺨치는 프로세스) 시험장에 사람이 꽤 많아서 놀랐었다.
칠판에 적힌 주제를 보고 A4 용지에 아무렇게나 글을 써 내려갔다.
햇살이 너무 포근해서, 너무 눈부셔서 더 울고 싶었던 그 봄날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이제 열일곱이었고 방과 후의 교실은 너무나도 서늘했다.
그때와는 달랐다.
며칠 뒤, 선배들은 1학년 반을 돌며 2차 면접 대상자 이름을 칠판 구석에 적어두었다.
우리 반에서는 나 혼자였다.
면접에 갔더니 반가운 얼굴, 예쁘고 글 잘 쓰는 중학교 동창이 있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반가움에 서로를 얼싸안았다.
꼭 함께 문예반에 들어가자고 했다.
그런데 면접을 보며 나는 뽑히기 위해서 꾸며낸 대답이 아닌 물어오는 질문에 모두 솔직하게 답을 했다.
간혹 못마땅한 표정도 보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또 3차 면접 대상자에 올랐다.
하지만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선배들이 이렇게나 무서운데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3차 면접에 가지 않았다.
그 친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면접일이었던 토요일 방과 후, 우리는 아직 쌀쌀한 봄바람이 부는 교정에 앉아 오후 내내 긴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조금 더 친해졌다.
그건 그렇고 감히 선배의 말을 거역하고 최종면접 노쇼를 하다니!!
선배들에게 혼날 것이 두려워 악몽을 꾸고 등교한 그날은 내생에 최고로 우울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아침 조회가 끝난 뒤 복도 쪽에 앉은 친구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문예반 선배 셋이 서있었다.
올게 왔구나! 나는 동물병원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선배들 앞에 섰다.
- 최종면접 왜 안 왔어. 다들 기다렸는데-
- 부, 부모님께서 동아리활동 하지 말라고 하셔서... (주말 내내 생각한 핑계) 정말 죄송합니다.
- 그랬구나. 아깝다...
선배들은 정말로 아쉽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전의 꼿꼿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그냥 친한 동네 언니 같은 얼굴들이었다.
그제야 나는 아, 뭔가 잘못되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지만 늘 그렇듯 두 번째 기회는 없었다.
만약 그녀들이, 혹시라도 부모님이 허락하시거나 마음이 바뀌면 다시 와-라는 말을 했다면...
나는 친구를 배신하고서라도 그러겠노라 대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글쓰기에 배신당했던 과거의 상처가 조금은 치유될 수 있었을까?
이것이 트라우마가 아니라면 무려 30여 년이 흘렀지만 그 어수선했던 아침, 교실 뒷문에 각기 다른 생김새의 세 여고생이 미소짓고 있던 풍경을 떠올리는 동시에 열일곱의 서툰 나로 돌아가버리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