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음이 향하는 것들로 완성한 나만의 취향 지도 안에서는 나는 쉽게 행복에 도착한다.
김민철<하루의 취향>
취향도 권력이라는 말이 있다. 취향에 녹아 있는 기호와 욕망은 소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김밥을 하나 먹더라도 “오이는 빼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취향이다. 소비를 할 때 처음에는 자신의 취향을 내세우는 일이 까탈스럽고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별다른 취향이 없다는 자격지심에 그 모습이 못마땅했다는 사실을 어느날 문득 깨달았다.
취향은 그 사람만의 개성이자 떠올릴 만한 단서의 역할도 해준다. 취향이 없다는 것은 나만의 개성이 없고, 나를 떠올릴 만한 단서를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서둘러 취향이란 것을 만들고 싶어졌다. 두리뭉실한 나 보다 본연의 내가 되고 싶어졌다. 취향을 찾는 일은 나를 찾는 일이기도 했다.
나를 규정해줄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는 비 오는 소리를 좋아하고, 비 온 뒤 초록빛을 떠올리는 풀 내음과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흙 내음도 좋아한다. 휘파람이 들어간 노래를 좋아하고, 책과의 연애, 그리고 새벽의 고요함 속에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작은 취향을 정립할수록 사소하지만,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했다. 마치 기록하지 않으면 그 취향이 사라지기라도 할 듯 조급함이 느껴졌다. 이십 대 후반 무렵 찰나의 취향을 기록한 개인 소장용 책을 만들기도 했다. 좋아하는 단어, 향, 소리, 영화, 음악, 꽃에 대해 글로써 풀어보니 나라는 사람이 좀 더 명확해졌다.
취향에 대해 한껏 몰입했던 시기가 지나자 다시 동글동글해졌다. 애써 취향을 기록하거나 생각하지도 않아도 되는 수더분한 나이가 된 것이다. 가끔은 취향 부자였던 그때의 내가 그립다. 지금의 나는, 내 취향 보다는 가족들의 취향에 맞추는 일이 다반사다. 한마디로 취향이라는 권력을 잠시 잊고 사는 중이다. 먹고 싶은 음식, 가고 싶은 곳, 읽고 싶은 책, 나의 하루가 오롯이 내 것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가끔 내공이 많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젊은 시절의 내가 바라던 모습이다. 그 내공이라는 단어 속에는 어쩌면 나만의 취향이 곁들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취향으로 자신을 단련한다는 글처럼 말이다. 취향을 나열하다 보면 저절로 원하는 것과 되고 싶은 것들이 곁가지로 나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나는 내 취향대로 나를 단련해 나가는 삶을 살다 보니 나름의 내공이 쌓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