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4학년, 학생회 활동에서 나는 기획부의 부장이었다. 부서가 완성된 후 첫 과업은 졸업생들에게 축하 문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혼자만의 취미였던 글쓰기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인가 싶어 설레는 마음으로 며칠을 쏟아 글을 작성했다.
초안이 완성되고 피드백을 받기 위해 부서 대화방에 글을 올렸다. 부원은 내 예상대로 괜찮은 것 같다는 의견을 남겼다. 너무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다면 아마도 1학년의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차장은 수정했으면 하는 부분이 있었는지 자신이 글을 일부 고쳐서 다시 보내도 되는지 물었다. 그의 물음은 나로 하여금 두 가지가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하나는 줄곧 타인에게 취미라며 낮추어 말했지만 못내 자부심을 가졌던 '내 글'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원의 말을 예상했듯 으레 그러려니 하며 넘어갈 거라 했던 '내 예상'이었다. 정교함은 빗나갔고 안일함은 발가벗겨진 셈이다. 예상이야 언제든 틀릴 수 있기에 부정당해도 그만이었지만 내 글만은 살아남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의 시간을 두고 각자 수정을 해온 뒤 다른 학생회 인원들에게 투표를 받자고 했다. 주어진 기간 동안 도공의 자세로 글을 다듬었다. 생각보다 글은 일찍 완성됐고 혹시 몰라 내 측근들에게만 미리 보여주어 품평회를 가졌다. 하나같이 입을 모아 좋은 글이라고 말해주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고대하던 결전의 날이 왔고 침착하게 결과를 기다렸으나, 도공의 자세로 들인 품이 무색하게 결국 내 글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것도 압도적인 차이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글은 스스로의 자부심에 그치지 않고 타인의 호평까지 더한 빈틈없는 글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런 공들인 글은 꼭 내 자식처럼 느껴지기에 어디 가서 맞고 온 내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쓰리기도 했다. 하지만 부정당한 것은 '내 글'뿐이고, 살아남은 것은 '우리의 일'이었고 후배의 '첫 성과'였기에 이를 좋게 여기며 결과를 오래 담아두지 않으려 애썼다. 잠시나마 들었던 억울한 마음이 이내 부끄러워졌다.
그럼에도 내 그릇이 작은 탓에 쉬이 사라지지 않는 여분의 미련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다 든 생각이, 살아남은 것들에 대한 축하였다. 우선, 공식적인 부서의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 그리고 그 시작을 후배의 글로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것에 대해 아낌없는 축하를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부서의 성과와 후배의 기를 살리는 만전지책(萬全之策) 이었다. 그러자 미련 속에 있던 내 글이 밀려났다는 아쉬움도, 단순히 후배보다 글을 더 써왔다는 것만으로 가졌던 자만도 모두 내 눈으로 직접 마주하며 털어낼 수 있었다.
만약 그때 무작정 내 글을 밀어붙였다면 일은 고사하고 소중한 사람을 초장부터 잃었을 것이다. 언젠가 동료들의 지지를 잃은 채로 홀로 나아가는 리더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발걸음이 아득히 외로워 보였다. 그만큼 사람을 남기는 것은 중요하다. 어디 닻과 노 없이 다니는 배를 본 적이 있던가. 또한 따지고 보면 나도 마냥 잃지만은 않았다. 한때 말단 부원의 경력이 전부였던 사람이 부장에 앉으니 그 성숙도 지혜도 부족한 게 당연했는데, 당시 일을 계기로 좋은 부장이 될 수 있는 길의 가닥을 잡을 수 있었기에.
별안간 무려 일 년도 더 지난 일을 회상하게 된 이유는 부서를 같이 했던 후배에게 며칠 전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당시 일을 같이했던 다른 부서와 합해 모임을 하고 싶다며 시간이 되는지를 물었다. 아쉽게도 지금 하는 일이 바빠 힘들 것 같다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지 주인공이 빠진다며 귀여운 농을 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며 자연스럽게 끝이 났으나 나는 꽤 오랫동안 자리에 머물러 내게 그리움과 아쉬움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게 참 좋아 구태여 후배의 말을 기쁘게 읽고 또 읽었던 것 같다.
매사의 대부분이 후회인 내가 돌이켜본 한 때의 선택이 기쁘게 여겨진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일말의 성장을 거두었다는 것일까. 그때 당시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성장이 이루어졌는지 몰라도 선뜻 연락을 주어 마음을 표하는 후배가 있다는 건 적어도 그간 걸어온, 그리고 계속해서 걸어갈 방향이 옳은 것이라 여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