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는 다람쥐와 수달 사이의 어디쯤에 해당하는 외모를 가졌다. 작달막한 키도 그렇거니와 걷는 모양새 그리고 머리가 어깨너비에 비해 커 보이는 가분수형 체형도 그러하다. 그는 말도 빠르고 걸음도 빠르다. 바쁘게 겨우살이 준비를 하는 다람쥐처럼 보일 때가 있다.
며칠 전 그를 롯데호텔 뷔페로 초대했다. 사과의 뜻으로 점심을 사는 참이었다. W는 20년 전 한국에 뷔페가 드문 시절에 먹던 것처럼 접시를 쌓아놓고 바삐 손을 놀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제 기분은 좀 풀리셨어요?"
내가 물었다.
"응, 그래, 그 얘기. 내가 속이 좁아서 그랬어."
"저도 죄송해요. 정말 일부러가 아니라 까맣게 잊었었어요."
3개월 전의 일이다. 나는 그와 점심 약속을 해 놓고선 나가지 않았다. 까맣게 잊어버리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그렇게 되었다. 그는 그 쉬운 문자 하나 보내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나타나지 않자 혼자 점심을 꾸역꾸역 먹고 난 후에서야 연락을 했다. 이미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을 하네.'라고 문자를 남겼다. 이후에 그는 내 카톡을 차단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잖아."
"네?"
"그 약속이 이미 한 번 미뤄진 거였어. 네가 바쁘다고 해서."
"그랬나요?"
기억에 없다.
"그리고 안 나왔지. 그러면서 다음 주에 연락 준다더니 영 연락이 없더라고."
"설마요, 진짜요?"
내가 그랬던가?
"삼진아웃. 그래서 차단했었지."
"다음 주는 아니었지만 어떻든 제가 연락을 드렸을 때는 읽지 않으셔서 차단당했나 보다 생각했어요."
W와 나 사이에 R이 있다. R에게 도움을 청해서 그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R에 말에 의하면 W는 삐져도 단단히 삐져 있다고 했다. R이 그를 설득해 카톡 차단을 해지한 후에야 이번 점심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여하튼 미안하게 됐지만, 그때는 나를 만나기 싫은가 보다 확신했었어. 사람이 세 번이나 그렇게 실망을 주기는 어렵지 않나? 내 주변에 나 바람 맞힌 사람 너 하나뿐이야. 그래서, 아, 저 친구는 나를 만나기 싫은가 보다 생각했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는 내가 자꾸 카톡을 확인하고 그러니까 아예 차단을 해버렸지."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이 뜨끔했다. 약속을 잊어버려서 못 나간 건 맞지만 그와의 식사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진 않았었다. 조금 귀찮은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R이 호찌민에 있을 때는 항상 셋이서 만났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먹고 마실 수 있었다. 내가 잊은 약속은 R이 호찌민을 떠난 후 처음으로 둘만 만나 먹는 점심이었다. 밥 먹으면서 화젯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나. 솔직히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긴 했다.
R을 껴서 셋이 어울린 게 횟수로 다섯 번째쯤 되었을까?
‘이제 말 좀 놔도 되겠지?’
W가 뜬금없이 물어서 얼결에 그러세요,라고 답하고 와서는 왜 쉬이 그러라고 했을까 후회를 했더랬다. 나보다 열 살 많은 아저씨인 게 맞지만 그러니 응당 말을 놓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뭐람? 그럼 나도 말 놔도 되냐?라고 물어볼걸. 그 날 이후로 W는 나를 ‘너’로 칭했다. 한동안은 그게 참 듣기 불편했다. 다행인 점이라면 W는 고리타분한 꼰대는 아니었다. 만나서 얘기를 나누어 보면 답답한 고구마보다는 시원한 사이다일 때가 많았다. 화제는 주로 본인의 사업 얘기 혹은 주변 사람 얘기. 실로 우리 엄마를 능가하는 수다쟁이였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다른 사람 얘기를 듣기도 했다. 자기 혼자만 떠드는 중년의 꼰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의 반말이 싫었는지 그 이후로는 그 모임이 크게 재미가 없었다. 그러던 중 마침 R이 도시를 떠난 것이었다. 어떻든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는 W의 직감은 소름 돋게 맞아떨어진 셈이다. 그도 프로이트를 읽었을 수 있다. 프로이트를 읽지 않아도 이 정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인 걸까?
“속 좁아서 그랬던 거니까 이해해줘. 애정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 내가 너 싫어했으면 그렇게까지 했겠니?”
내가 과일 담은 접시를 테이블에 놓으며 앉자 그가 하던 얘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두면 저 얘기를 식사가 끝날 때까지 도돌이로 할 터였다.
"그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요?"
"아, 그랬나? 그래. 적절하게 잘 끊었다. 안 그럼 계속할 수도 있어."
"사업은 어떻게 잘 돼가요?"
화제를 돌릴 겸 한 질문이었는데, 그때부터 약 30분가량을 그가 새로 시작한 사업 얘기를 들었다. 지루한 얘기는 아니었다. 코로나 시기에 특수를 누리는 오퍼상들에 대한 얘기였다. 지금 가장 핫한 아이템은 의료용 장갑이라고 한다. 한동안 다들 마스크만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그건 오히려 똥값이 되었다고. 말이 무역이지, 도박판이나 비슷한 얘기로 들렸다. 그는 바이러스로 시장이 위축되기 전까지는 호찌민에서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했다. 그가 한국에서 호찌민으로 넘어온 지 3년 반이 되었다. 그는 나와 달리 오자마자 베트남어부터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베트남 상인들과 계약서를 꾸릴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베트남어로 보는 부동산 중개 자격시험도 치러 합격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한창 호찌민시에 새로 올라오는 아파트를 팔아 재끼는 것 같았다. 물론 올해 초까지의 얘기다. 부동산 시장이 죽어서 뭘 하나 궁금했는데 의료용 장갑을 수출하려고 한단다. 한 건 제대로 터지면 몇 억을 한꺼번에 벌게 될 거라고 했다.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지 신기하네요. 바로 체질 바꿔서 다른 시장에 뛰어든 거잖아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재빠른 움직임이 경탄스러웠다.
"우리 마누라가 그러는데 나는 사소한 결정을 못해서 질질 매는데 큰 결정은 너무 가볍게 해 버린데. 무서울 만큼. 그래서 너하고 연락 끊었던 거야. 무섭지."
다시 도돌이다. 젠장.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는 앞으로 터지게 될 큰 한 건 때문에 내내 흥분상태였다.
"크게 터지면 다 같이 모여서 밥 한 끼 또 먹어요."
"밥 한 끼가 문제야? 내가 응, 응, 너한테는 호찌민에서 가장 비싼 걸로다가 사 줄게."
"네. 그래요. 제발 그렇게 해 주세요."
마침 비가 내려서 택시에서 내린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쪽으로 뛰어갔다. 나는 나대로 사무실 방향으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