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국 방문으로 3년 만에 부모님을 만나 뵈었다.
2. 엄마 만나기
3년 만에 만났지만, 그동안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영상 통화를 해왔다. 영상으로도 노쇄해 가는 부모님 모습이 잘 전달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부친의 더 굽은 어깨라던가 엄마의 윤기 없어진 머리털 같은 것은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엄마는 내 짧고 바쁜 일정 가운데에도 꼭 진도에 있는 쏠비치라는 곳을 가고 싶어 했다. 남들 다 갔다고 했고 자기만 못 가봤다고 했다. 가본 사람들은 뷰가 그렇게 좋다고 칭송을 했다고 했다. 일박이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수요일 아침 대장내시경을 하기로 되어있었지만, 월요일 화요일을 쏠비치에서 머물기로 했다. 부친은 다른 약속이 있어 못 간다고 하는 바람에 엄마는 쾌재를 부르며 본인의 지인 두 명을 불렀다. 넷이서 진도로 향했다.
나는 그렇게 소리를 질러가며 수다를 떠는 무리를 본 적이 없다. 수다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수다를 왜 귀먹은 사람들처럼 악을 써가며 하는 것일까. 내가 이렇게 귀머거리가 되는가 보다 생각했다. 엄마는 원래도 말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번에 만나보니 그 수다력이 극강에 달해 있었다. 극강의 수다력은 일종의 고집에서 나오는 듯했다. 나이가 들수록 신념이 확고해지는 거야 엄마만의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자신이 아는 얘기든 모르는 얘기든 무조건 안다고 믿는다는 데 있었다. 그 확신의 정도가 어마어마해서 누군가가 다른 의견을 내면 서로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면서 같은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했다. 주제는 정치, 사회, 경제를 다 아울렀고 가장 큰 비중은 '지인 걱정'이 차지했음은 물론이다. 예를 들어, 엄마의 지인 A와 B가 싸웠는데 엄마는 A 편을, 우리 차에 동승한 엄마 친구는 B 편을 드는 것이다. 그게 누굴 위한 논쟁인지 알 수는 없는 상태로 그들은 수년 전 일부터 연도별로 리포트를 했다. 그런 식이었다. 거의 두 시간을 가는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도마 위에 올랐다. 게 중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나는 그들을 만난 것처럼 각각의 개인사를 알게 되었다. 저렇게 칼로리를 태워가며 수다를 떠는데, 왜 엄마의 체중은 줄지 않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다.
엄마는 내가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는 말을 들은 후에 바로 꽃게를 사다가 간장게장을 담았다. 스물다섯 마리라고 했다. 저거 누가 다 먹는단 말인가. 진도의 쏠비치는 식당도 있고 조식도 있는 곳이라고 했는데도 엄마는 출발 전날부터 바리바리 뭔가를 싸기 시작해서 진도행 차에 보따리를 여섯 개를 실었다. 간장게장이 일 번으로 실렸고, 각종 과일(딸기, 포도, 배, 사과, 수박....), 파김치, 배추김치, 물, 김, 햇반 등. 그리고 엄마의 옷가지들까지. 이게 과연 일박만 하고 올 사람의 짐인가 싶었다. 말렸지만 허사였다. 다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바리바리 피난 짐을 싸가지고 리조트에 가는 거 창피하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내가 계속 꿍시렁대자 엄마는 본인은 그렇게 안 싸가지고 다니면 직성이 안 풀린다면서 자기를 말릴 생각은 말라고 선언했다. 뷔페는 아무리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걸 듣고 나도 포기했다. 20년도 더 전에 시어머니가 여행길에 고추장 단지를 차에 싣던 게 생각났다. 그래. 고추장 단지보다는 낫다... 그리고 간장게장은 맛있어서 가지고 간 네 마리 큰 놈을 넷이서 앉은자리에서 다 먹었다.
진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완도를 꼭 들러야 한다고 했다. 거기에 있는 식물원도 꼭 가야 한다는 걸 간신히 뜯어말렸다. 결국 완도 회센터만 들러오는 걸로 합의를 했다. 참돔과 갑오징어 회를 맛있게 먹고서는 집에 있을 사람을 위해 회를 떠가야 한다고 했다. 집에 누가 있는가 하면 부친이 있었다. 엄마는 네 아빠는 회를 안 좋아한다, 고 연신 얘기하면서도 참돔 한 마리를 따로 챙겼다. 아빠는 저녁 식탁에서 생선살을 두어 점 집어 먹고 말았을 뿐이다. 엄마는 참돔을 와구와구 맛있게 먹어치우는 식구들이 없는 게 한스러웠을 테다. 엄마의 큰 손을 해갈할 수요가 없는 것이다.
엄마와는 사흘 밤을 같이 보냈다.
엄마와 나는 멀리 떨어져 사는 동안 공통점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 엄마의 목청과 큰손이 낯설어서 사사건건 남 같았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엄마는 원래 그랬다. 예나 지금이나 내내 그랬다. 나는 원래 번잡스러운 걸 싫어했고 엄마는 소문난 큰손이었다. 오래전에 엄마 근처에 살 때 아침저녁마다 온갖 일로 나를 불러내던 일이 생각났다. 사실은 나만 불러냈던 건 아니다. 엄마는 사람 불러 모으는 걸 좋아했다. 음식도 한 솥 해서 이 집 저 집 나누어 주는 걸 즐겼고. 남들 하는 잔치에 자기가 음식 하겠다고 나서고. 남이 먹고 싶은 걸 자신이 정해주고 심지어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다. 그게 싫어서 멀리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가 오랜만에 만났더니 이러다가 남이 되는 거 아닌가 싶게 의견 일치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와서 엄마를 달리 보는 건 나의 변화일 수도 있다. 우리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생긴 고집대로 더욱 공고해질 거다. 우리는 엄마와 딸 사이지만 많이 다르고 타협하지 못할 것이다.
엄마가 베트남에서는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물었다. 엄마는 내가 돌아올 거라는 걸 디폴트 삼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부친이 짓고 있는 집 이층에 와서 살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냥 대강 7년 후라고 둘러댔다. 7년이면 시간 많이 벌어놓은 것 같지만 이제 안다. 7년 따위 순식간에 지나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