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앞에는 복권 가게가 있다. 그 근처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종종 가게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종이를 들여다보며, 그것이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길 꿈꾸는 사람들. 종이에 적힌 별 볼 일 없는 숫자들은 사람들의 시선 너머로 막연히 환상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다 각자 나름의 사정으로 바랄 돈들. 평생 뼈 빠지게 일해도 서울의 집 한 채 못 구한다는 절망적인 문장이 대표하는 시대에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네모난 종이.
그걸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노라면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무에게도 팔리지 않던 성냥의 불길 속에서 그 무엇보다 바랐던 꿈을 본 소녀. 갓 스물이 된 나에게, 복권 하나에 건 희망으로 힘든 일주일의 노동을 버틴다는 말을 해주던 언니.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누군가 삶을 목 맬 만큼 간절하기도 누군가에겐 유일한 위로이기도 하다. 그것이 비록 허상일지라도.
사랑에 빠졌다. 정확히는 빠져버렸다.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불은 순식간에 붙어 내 온몸을 휘감았다. 펄펄 끓는 불 속에서 정신이 아득하다. 사랑에 취한 눈동자가 자꾸만 휘청인다. 애인은 우리가 서로의 환각 진통제 같다고 했다. 하루종일 관능적인 음악을 틀어 놓고 그가 보내는 문장 하나하나에 흐득인다. 그의 솔직하고 야생적인 언어들은 내 속을 뒤집고 비틀어 끝내 게워내게 한다. 젠 체 하는 이런 글에서는 차마 쓰지도 못할 말들을 속살거리며 너에게 빠진 내가 어디까지 노골적일 수 있나 구경한다.
다시 사랑을 시작하면 예쁘고 싶었다. 웃고만 싶었고 핑크빛 비눗방울이나 띄우고 싶었다. 좀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고 내 사랑이 성숙해졌다 믿었다. 고생 끝 행복 시작, 뭐 그런 슬로건을 상상했다.
영리한 그는 곧장 내 아픔을 알아차렸다.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겠다는 결심에, 순식간에 울대까지 차오르는 울음에 차마 말 못 하고 웃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오니. 하필 이번 주가 기일이었다. 묻어놨던 슬픔이 비말을 일으켰다.
사랑은 시작만큼이나 빨리 끝났다. 한여름 밤에 꾼 꿈처럼, 신기루처럼 사랑은 저 멀리멀리 부서져 날아간다. 성냥팔이 소녀의 짧은 불빛은 진한 여운을 남겨 자꾸, 자꾸만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빨리 사랑에 눈 돌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만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성냥을 켠다. 어느새 한 곽이 다 닳아 손 끝에 불길이 바짝 스며들 때면, 그때서야 가슴보다 손 끝이 더 아플까. 손 끝이 불에 데어 깜짝 놀라 성냥을 떨어뜨리고 나면, 그때서야 너를 놓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