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란색을 좋아한다.
나의 노랑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쉽다.
바로 곰돌이 푸의 색이다. 어쩐지 해맑지 만은 않은 노랑, 주황이 조금 섞인 노랑을 좋아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색을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된 건 2년 정도 되었을까.
나는 취향을 고집하는 덕후의 기질이 없었다.
예쁘고 잘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사람들이 부러웠지만, 넉넉하지 못한 현실에 대충 무난한 옷으로 나를 눌렀다.
좋아하는 노래와 밴드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부러웠지만, 탑 100을 듣고, 지겨우면 셔플로 듣는 정도로 시대의 흐름에 발을 담갔다.
그 현실은 대충 이러했다.
나에게 못되게 굴진 않지만, 모든 행동에 어쩔 수 없음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새엄마와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살았고, 그 중간다리 역할을 회피하던 아빠는 가족 일에 제 3자인듯 굴어 나는 어릴 때부터 심리적인 독립을, 대학 때부턴 경제적인 독립을, 매일 혼자를 준비해야 했다.
친조부모를 포함한 6인 가족이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으면서도, 새엄마는 내게 학자금 대출을, 심지어 생활비 대출로 내 용돈까지 쓰기를 바랐다. 나는 왕복 4시간의 학교를 다니며 알바도 했고, 성적도 지켜냈다.
그 시절의 나는 가족의 중간 다리였다. 마치 다리로 태어나 잇는 것이 사명인 사람처럼, 이 가족을 잇지 않으면 내가 사라질 것처럼 애썼다. 조부모의 새엄마 욕을 들어주었고, 새엄마와 조부모 사이의 곤란함을 중재해 주었고, 새엄마와 아빠의 벌어진 사이를 끊기지 않게 오갔다. 새엄마가 낳은 동생을 사랑했고, 온 가족이 치킨 먹으며 예능 보는 그 시간에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하고 싶어 했다. 나는 겨우 그 정도로 가족이 온전함에 안도했다.
예능을 함께 볼 가족은 있어도, 내 욕구를, 슬픔을, 이야기할, 요구할 가족은 없었다.
가족이 전부인 나에게, 가족은 없었고, 그래서 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교의 심리 상담 선생님과 상담을 진행했고, 머리를 띵 맞았다.
내가 ‘다리’인 줄도 모르던 나에게 선생님은 물었다.
“네가 그렇게 노력을 해도 아빠가 변하지 않는다면 어떨 것 같니? 아빠는 그런 성격으로 몇십 년을 살았으니 바뀌기 어려울 수도 있을 거야. 그럼 너는 어떨 것 같니?”
아차 싶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런 노력이 아빠를, 우리 가족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던 나의 ‘다리’ 자아는 의식하는 그 순간 그렇게 무너졌고, ‘나’는 기회를 얻었다.
무너진 잔해들 속에서 나는 열심히 내 조각들을 찾아 쌓았다.
그 속은 손으로 마구 휘저은 어항처럼 어지러웠다.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고, 내 미래를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취향을 한 번 더 생각하고, 시도했다.
이게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인지, 하고 싶은 것들인지를 작은 선택부터 두들기며 습관을 들였다.
차츰 또래가 신는 높은 구두는 가라앉고, 운동화가 떠올랐다.
투박한 스니커즈는 가라앉고, 얄쌍한 컨버스가 떠올랐다.
베이지, 검정, 회색의 티셔츠들이 가라앉고 발랄한 프린팅에 몸에 착 들러붙는 티셔츠가 떠올랐다.
칙칙한 색들이 가라앉고 노랑이 나를 유혹했다.
탑 100의 노래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밝고 벅찬 기분을 들게 하는 희망적인 밴드의 곡들이 남았다.
그림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이제 전시를 보며 행복을 느낀다.
내 어항은 그렇게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인생은 취향 만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것인지, 이젠 취향에 깊이가 없어 불만스러운 것이다.
누군가는 그림이 좋아 전공을 하고 다양한 작가를 소개하는 유튜버가 되는가 하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인테리어, 소품의 취향으로 인플루언서가 되기도 한다.
부럽지만, 나는 그렇게 될 수는 없다. 내 취향은 애매하고, 일관적이지 못하다.
독립한 나의 공간은 약간의 유행과 조금의 실용성이 섞이고, 대부분의 내가 손댈 수 없는 낡은 전셋집의 것들로 구성되었다. 나는 취향의 끝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취향과 욕구를 끌어와 내 통장과 실용성 앞에 앉혀 놓고 타협하기에 능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빠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빠가 역할을 하진 않았지만, 존재만으로 가족을 잇는 다리였기에
우리 가족은 와해되었다. 새엄마는 동생과 짐을 꾸려 친정으로 들어갔고, 할아버지만 그 큰집에 남게 되었다.
돌아갈 곳 없이 야박하고 복잡한 서울 동네에 세를 얻고 사는 나는 조급해졌다.
어린이 출판사에 다니며, 첫 기획으로 출판사 입장에서 가성비 좋을 책을 만들었다. (내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너무 재미있어할 설레는 첫 기획의 책이었고.)
그 책은 1년 만에 입소문으로 흥했고, 시리즈 도서를 지시받았으며, 10쇄를 넘긴 출판사의 효자템이 되었다.
내 기획으로 성공의 경험도 맛본 4년 차인 지금, 연봉은 어디에 견주어도 너무 적고, 제작비, 영업팀의 선호 등을 이유로 이것도 저것도 안된다는 출판사 사정으로 (다른 출판사는 다 만드는 책의 형태를 대체 왜 못하겠다는 건지.. ) 설렘을 안고 기획을 하기엔 집안 형편을 익히 알고 대학을 포기하는 고등학생의 심정이 되어 우울하기만 한 것이다.
20대 후반이 되니, 내 또래들도 성과를 내기 시작하고, 각자 자리를 잡거나, 돈을 많이 버는 모습을 종종 본다. 물론 나도 잘하고 있고, 나보다 불안한 또래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이 세상은 나와 같거나 나보다 불안한 사람을 강조하지 않는다. 내가 소비하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성과이고, 당당히 회사를 나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유튜버와 인스타 스타들로 범벅이다.
주식, 비트코인, 조회수로 경제적 자유를 외치는 또래들 사이에서 책을 기획하고 느긋하게 연차를 쌓기란 그들이 개미이고 나는 베짱이가 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나는 집 하나 갖고 싶을 뿐이다. 강남의 집을 매매해 유명한 작가의 가구로 집을 채우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나를 온전히 드러낼 방 두 칸에 거실이 있는 집이 갖고 싶은 것이다. 이게 내가 태어나 가장 크게 갖는 욕심이라는 것이 매번 나를 우울하게 한다.
이젠 책 속의 위로를 덮고 나면 화려함으로 나를 압박하는 시대의 양상이 내 취향의 깊이까지 비난한다.
해맑지만은 않은 노랑은 희망을 가장한 불안이었을지도 모른다. 햇빛이 내리쬐는 시간을 좋아하니 노랑에 유혹당한 것이 당연하다. 내리쬐는 빛을 쬐고 있으면 희망이 차오르고, 벅찬 마음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부팅되는 기분이 든다. 푸의 색은 내가 생각하는 강렬한 햇빛의 색이다. 그 노랑이 주는 희망을 좋아하는 건 역시, 안정적이고 싶은 불안이 이끈 선택이었을까.
이 노랑은 희망이자, 불안이자, 벗어날 수 없는 이 인생의 굴레 같다.
드디어 가족들에게서 벗어나 나를 찾아 선택한 이 취향은 사실은 그렇게 흘러갈 굴레 속에서 만난 희망을 가장한 한계일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조금만 더 안정적이고 싶다. 모으는 족족 학자금으로 빠져나가는 1년에 이자를 2만 원 밖에 안 주는 이 적금의 시대에, 더 부지런하고, 똑똑하게 투자하고, 나만의 콘텐츠로 조회수를 벌고 싶어지는 이 시대에, 나는 그러기엔 애매하고 게으른 사람이라, 이 마저도 아빠를 똑 닮은 모습이라 조급함만 남는 것이다.
그림을 너무 좋아하여 <너랑 나랑 노랑>을 읽었지만, 색을 주제로 글을 쓰기엔 턱없이 부족한 내가,
아동학을 전공하여 온전한 나를 찾아내고, 성격과 맞는 기획편집자로 입사했지만, 아주 작은 시장을 겨냥하여 안전한 미래 잔고를 꿈꿀 수 없는 내가,
일반인치고는 보고 그리는 것을 잘하지만, 업으로 삼기엔 한참의 노력이 남은 내가,
어딘가 깊이 없고 애매한 삶의 내가 어떻게 또다시 뒤섞인 이 불안을 가라앉히고 깊은 어항으로 이사를 가게 될지 모르겠어 요즘은 노란색의 아이템들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하나를 선택해 파고들 용기가 돈이 없이는 나질 않는다.
이러한 나의 요즘에 따뜻한 위로를 느끼고 싶어, 정리된 글을 쓰기엔 시간이 부족해 참여하길 포기했다가, 이 기회를 놓치기 아까워 부랴부랴 글을 써 뻔뻔하게 전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