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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닿지 못했던 세상은 단 하나, 사랑의 세계

누군가 사랑의 정의를 묻는다면,

by 김부리

학교 다닐 때, 그런 아이가 꼭 하나쯤은 있다. 안경을 고쳐 쓰며, 세상 모든 이치를 다 깨달은 채 하는 아이. 실제로 그 아이가 하는 말은 대부분 맞다. 눈치가 어찌나 빠르고 닿는 눈길이 얼마나 세밀한지, 선생님의 속내까지 알아차려 버리곤 했다. 똑똑하고 당연한 것이 많아 종종 잔소리꾼이 되는 아이. 싫은 소리 듣기 싫어 모든 일을 제대로, 완벽하게 하고 싶어 하는 아이.


그 아이의 방은 무엇으로 차 있을까?


책상 앞에 앉아 안경테를 올리며 제도 샤프로 공부에 매진할 것 같지만 사실 다 알만한 세상은 재미없었다. 내가 닿지 못했던 세상은 단 하나, 사랑의 세계.


그렇게 온갖 인터넷 소설, 팬픽, 하이틴과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영화를 섭렵하던 아이는 어른이 되자마자 곧, 남들 다 하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인지 본격적으로 시도해 보고자 했다. 그렇게 오는 만남을 족족 다 시도하던 때가 있었다. 한 달을 못 갔다. 싫은 점만 보이고(콧구멍이 싫어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들을 만나기 전엔 배가 불편했다. 드라마 속의 커플의 모양은 나오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혹시나 새드 엔딩일지 모를 멜로는 절대 보지 않았다. 확실한 해피 엔딩만이 내 배 속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끝이 싫었다. 그런 나의 사전엔 모든 사랑은 설레게 만나 함께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결혼하는 해피 엔딩만이 사랑으로 등재되었다. 인물의 직업은 다를지언정 그렇게 한 갈래의 흐름으로 정의되었다. 물론 나는 똑똑하니까, 그게 픽션이라는 건 알지. 그런데, 그러니까, 대체 픽션 밖의 사랑은 뭐가 다른 걸까? 작가의 설정 밖의 나는 이 사람이 귀여운 건 전혀 모르겠고, 시간을 쓰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데 말이다. 왜 내 앞에는 끝이 행복할 것만 같은 사랑이 뚝 떨어지지 않는 걸까?


그렇게 연애를 목적으로 한, 우연보단 의도가 가득한, 오는 만남들을 미션 처리하듯 대하며 알게 된 건, 단 하나. 이렇게는 사랑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똑똑해도, 아무리 야무져도 그건 머리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어지는 미션 실패에 막연한 의심도 하나 더. '나는 사랑을 못하는 사람일지도 몰라.’ 나는 집 안에서 사랑을 찾아내는 데 실패한 사람이니까. 아주 나중에 깨달은 사랑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하나 공개해야겠다. 사랑은 마음이 하는 거라는 것. 너무 당연하지만 체감하기는 아주 어렵다. 마음의 감각이 깨어 있는 사람만이 감정에 몰입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손잡고, 이 사람은 어떤 타입이고, 나를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어떤 척을 해야 하고… 이게 다 머리로 익힌 통념을 머리로 재생산하는 일이라는 거다.


그때까지의 내 마음은 사실 가족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어디 비하면 한참 이상하지만, 그래도 나를 지켜 줄, 내가 사랑하는 이 집을 지키기 위해 이미 내 체구 이상의 에너지를 다 쓰고 있었다. 심지어 그 에너지를 다룰 줄 몰라 나는 종종 뾰족한 모양으로 머리를 썼고, 상대를 가늠하지 못하고 냅다 마음을 앞세워 부딪히고 깊게 파고들었으며, 그 끝엔 자주 지쳐 울었다.


내가 보는 모든 드라마, 영화, 소설 속에는 상황이 어려워도 단란한 가족이 있거나 모진 가족이 있어도 사랑을 만나고 마는 해피엔딩이 있었다. 내가 아니면 곧 무너질 것 같은 가족을 지키다 지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집에서만큼은 당연한 사랑이 가득 받아야 하는데, 언제나 외사랑 같았다. 그러니 내가 시도해 볼 다른 사랑으로 눈을 돌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다. 막 성인이 되자마자 분위기를 타 남들 다하는 연애로 시선을 돌려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눈을 돌리는 것만으론 마음의 시선을 돌릴 수 없다. 아직은 사랑을 받기에도, 주기에도 너무나 어색하고 집중할 수 없던 마음의 상태였음을 한참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위에 무언가를 짓거나 올려두기에는 내 마음의 기초가 아직도 마르지 못한 질척한 흙이라, 내 발도, 상대의 마음도 푹푹 꺼지고야 마는 시기였다.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지만, 당시에는 씁쓸하게도 아주 오래도록 내 하루가 가족들과 시작해 가족들로 끝났다는 점과 심지어 내 전공이 부모와 아동을 다루는 아동학이라는 점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마음의 미션은 집 안에서 가족을 붙잡느라 찢기던 나를 다시 이어 붙이는 일임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되었다.


미션을 해내기 위해선, 아슬아슬 와해될 것 같은 가족을 내 사지를 이용해 잡아끌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 노력이 정말 그들을 잡아 둘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 아무리 부정해 보아도 똑똑한 내가 보기엔 당연히 그럴 수 없다가 정답이었다. 아주 오래도록 그렇게 살아와 단단하게 굳어 버린 어른들을 내가 생각하는 해피 엔딩으로 잡아 끄는 건 운명을 거스르는 신의 아들이나 할 법한 일이었다. 해내면 기록되고, 못하면 평생이 불행해지고 마는. 내가 지키려는 이 집이 나를 지키는 집이 아니라, 문을 열고 나와야 할 집이라는 것도 억울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결핍을 안고 집 안에서 고군분투하기엔 내 인생이 뒤로 밀리고 있었다. 축축한 어른들을 빽빽이 품느라 굳히지 못했던 내 마음의 한가운데에 ‘나’를 세우는 과정이 필요했다.


에너지를 나에게 쓰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힘들어도 해 보는 것, 내 미래를 상상해 보는 것, 이전보다 좀 더 나아져 보는 것들을 신경 썼다. 내 기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남들에겐 쉬워도 나에겐 곧 죽어도 못하겠는 것들이 있고, 눈 질끈 감으면 넘어갈 수 있는 가치들도 있으며, 남에게 맞춰 넘어갔는데 잠 못 들고 아주 오래 후회하는 일들도 생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족 관계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내가 용돈을 벌었다. 장학금을 받았고, 눈치 보느라 하지 못했던 말도 해보았다. 관계는 좀 더 간단해졌고, 깊지 않지만 단란해졌다. 유능감이 커져갔다.


그렇게 어른들을 솎아 내 땅을 굳히고, 때마다 필요한 바위를 하나씩 골라 흙을 비비듯 눌러 잘 박아 놓고, 그 돌을 밟아 건너며 앞을 보고 사는데 집중했다. 그러니 반대쪽에서도 돌을 놓으며 자신의 길을 가던 사랑이 이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가까이 온 것이 사랑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내가 되어 있었다. 넘어지고 다친 나를 세우는 과정을 겪은 ‘나’는 아파하는 사람들, 도움을 주는 사람들, 순간의 친절, 사람의 따뜻함을 볼 수 있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비로소 사랑받기 위해 누구를 위하거나, 의식하지 않고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내다보고 내 사전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자주 공감과 사랑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그 태도는 마침내 사랑의 집을 내 앞으로 데려와 주었다. 내 명의로 소유하게 될 유일한 나의 안식처, 최초의 집에서 독립한 내가 옮겨갈 나의 집.


잘 살아온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치대어 반죽해 틀에 넣고 구워본다. 그렇게 나온 달콤하고 따끈한 사랑에는 내 삶에 쏟은 노력이 그대로 잘 녹아 있을까? 상대에게 맞는 달콤함과 쫄깃함일까? 집을 옮기고도 사랑은 삶과 함께 진행된다. 옮긴 후부터 진짜 시작이다.


돌 하나하나 골라 심다가 만났으니 또 함께 돌을 고르고 디딜 곳을 내다보아야 한다. 내 삶을 살며 사랑의 삶도 살아야 하니 마음은 더 바쁘고 한동안은 부딪히고 깨지느라 요란할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집에서처럼 내 사지를 걸고 내 마음을 찢지는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집을 쉽게 포기하고 옮기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꾸리고 싶은 이 집이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아 행동할 것이며, 너의 집이기도 한 이 사랑을 지키는데 의리를 다할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가 커서 지금 내리는 사랑의 정의는 뭐냐면, 나에게 온 당신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당신이 내가 만나야 할 사랑이다. 당신에 대한 설명, 우리를 대하는 나에 대한 설명을 써나가다 보면 그 모든 것이 내가 내리는 사랑의 정의이다. 함께 보낸 시간이 쌓이듯 그 정의는 계속 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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