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파이 Jul 30. 2024

자유와 낭만 그리고 식민지의 나라, 프랑스

김태의

 프랑스를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아무래도 유럽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국가이다 보니 여러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떠오를 것이다. 프랑스는 건축물, 패션, 음악, 미술 등의 많은 분야에서 유명한 문화 강국이며, 역사에서도 마치 소설같이 멋진 모습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시민혁명, 나폴레옹의 유럽 정벌, 잔다르크의 백년전쟁 종결, 샤를 드골의 파리 해방 등 우리에게 알려진 프랑스의 유명한 일화들은 하나같이 멋지고 낭만적이기 그지없다. 


 이쯤에서 프랑스 찬양은 그만두도록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영국, 프랑스는 히틀러 벙커 방향으로 하루 세 번씩 절을 해라, 걔가 어그로 다 끌어줬다.) 


 프랑스가 대표적인 제국주의 국가였다는 것은 많이들 알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를 운영했다는 것까지만 알았지, 이런 짓까지 했던 것은 알고 있었는가? 지금부터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아이티 140년 식민지배


 아이티는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섬나라이다. 15세기까지 10만 명 이상이 원주민들이 살았지만 스페인인들이 옮긴 전염병에 대부분이 사망해 버렸다. 일할 사람이 없어지자 스페인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사 와서 일손으로 써먹었고, 이들이 아이티의 주민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가 섬의 절반을 인수하여 식민지로 경영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잔혹한 식민지배가 시작되었다.


 프랑스 농장주들은 8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을 데려와서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구축하였다. 이곳은 세계 최대의 커피, 사탕수수 생산지가 되었고 프랑스 국부 4분의 1을 조성할 정도로 부유한 식민지가 된다. 그 과정에서 아이티인들은 끔찍한 학대를 당했는데, 채찍질을 당하거나 거세를 당하기도 했고 팔다리를 바퀴로 부수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801년,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혁명에 영향을 받은 아이티인들이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포로들을 화형 시키고, 수장시키고, 가마솥으로 삶아 죽이고, 원형 경기장에서 개한테 물려 죽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량학살을 위해서 배의 짐칸에 포로들을 싣고 나가서 이산화황 가스로 질식시켜 죽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가스 선박 학살 피해자가 10만 명을 돌파했고, 그 탓에 아이티 해변에는 선박에서 죽은 시체들이 매일같이 떠밀려왔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학살을 진행시킨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인데, 후세에 이 나폴레옹의 팬이었던 한 독일인이 자국에서 총통이 되어 이 가스실을 다시 재현했다는 속설이 있다. (아돌프 히틀러)


 프랑스군이 전투에서는 우세했지만 전염병에 시달려 큰 피해를 입은 탓에 아이티에서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티는 최종적으로 독립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티의 독립은 노예제도를 가지고 있던 유럽 각국과 미국에 경계대상이 되었고 아이티는 외교적 고립을 당하게 된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아이티는 프랑스와 협상을 진행하게 된다.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


 협상에서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 있었던 프랑스는 기적의 논리를 쏟아내기 시작하는데, 아이티의 독립으로 프랑스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니 아이티가 이를 배상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현재 국제 사회에서 저랬다가는 역으로 프랑스가 외교적 고립을 당할 수도 있을 만한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이었지만 19세기 야만의 시대에서 그딴 건 없었고 당시 아이티에게도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프랑스가 요구한 금액은 1억 5천만 프랑으로 이는 당시 아이티 GDP의 10배에 달했다. 


 당연히 이를 제대로 갚을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채무불이행이 반복되다가 후에 다시 협상을 진행하여 9천만 프랑으로 금액을 낮췄다. 물론 이것도 낮은 금액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티는 프랑스, 독일, 미국 은행들에서 돈을 빌려서 필사적인 빚 돌려 막기를 자행했고 완전히 상환하는 데까지 123년이 걸리게 된다. 그리고 이 사태는 아이티가 지금까지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꼽히게 만들어준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제 두 번째 사례를 알아보도록 하자.


알제리 전쟁


 알제리 전쟁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프랑스가 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알제리의 시위대는 나치 독일의 항복 시기에 맞춰 시위 운동을 개시하였고 이들은 프랑스인 상점가를 행진하였다. 

행진하는 알제리 시위대

 이를 막기 위해 출동한 프랑스 헌병대와 알제리 시위대가 충돌하였고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주변 지역으로도 폭동은 확산되었고,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유럽계 민간인 100여 명이 사망하였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알제리를 무력 진압할 명분이 생겼다며 알제리에 계엄령을 선포한 뒤 정규군을 투입하였다. 투입된 프랑스군은 알제리 마을을 폭격하여 4천 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결국 알제리의 독립운동단체 ‘민족해방전선’이 독립을 선포하며 알제리 전쟁이 발발하였다. 

프랑스 군의 학살로 사망한 알제리인

 월등한 군사력을 가진 프랑스군은 알제리에 함포사격과 폭격을 퍼부었고 포로들을 잔인하게 학살 및 고문하였다. 전력에서 프랑스군이 앞서는 것은 분명하였지만 민족해방전선은 게릴라전을 벌이며 저항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알제리인들을 향한 보복 학살을 자행하였다. 전쟁이 지속되며 프랑스를 향한 세계의 비난이 쏟아졌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계속된 전쟁으로 사기가 하락하며 내부 분열로 이어졌고, 결국은 프랑스의 패배로 전쟁은 종식되었다. 8년 간의 전쟁으로 알제리 민간인은 150만 명이 사망하였고, 뼈아픈 희생을 통해 알제리는 독립할 수 있었다.


아직 안 끝났다.


 위와 같은 혁명과 독립운동을 통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하였다. 하지만 아직 독립하지 못한 식민지들이 현재 유럽 국가들의 해외 영토로서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이 해외 영토를 가지고 있다. 

 

 해당 사진은 2024년 기준 해외 영토를 포함한 프랑스의 영토이다. 이 중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에는 한 달 전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뉴칼레도니아 원주민들이 독립을 위해 폭동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뉴칼레도니아의 위치, 호주 옆에 위치해 있다.

 뉴칼레도니아는 원래 태평양 원주민들이 살던 곳이었지만 1843년 프랑스가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고, 여타 식민지들과 같은 루트를 밟게 된다. 원주민들이 봉기를 벌이며 저항하였지만 프랑스는 원주민 마을을 모조리 파괴해서 봉기를 진압했고, 원주민들은 보호 구역으로 밀려났다. 프랑스인들과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이 유입되고 원주민들의 인구 비율은 40%으로 줄어들며 오히려 소수가 되고 있다.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던 원주민 차별 정책 탓에 원주민들은 현재까지도 높은 빈곤율에 시달리고 있으며 뉴칼레도니아 교도소 수감자의 80%을 차지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프랑스의 통치에 대한 이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독립 찬반 투표를 하는 뉴칼레도니아인

 원주민들은 독립을 위한 시위를 벌였고, 폭력 사태가 커져가자 프랑스 정부는 뉴칼레도니아의 자치권을 대폭 확대하고 20년 뒤에 주민 투표 3번을 통해 독립 여부를 정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해당 합의가 지어졌던 1998년 이후 20년이 지난 2018년과 2019년에 두 번의 투표가 있었지만 두 투표 모두 결과는 독립 반대였다. 원주민들은 91%가 찬성을 던졌지만 프랑스계 주민들과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이 대부분 반대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찬반 비율은 53대 47로 근소한 차이를 보였다.


 2020년에 투표를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원주민들은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를 위한 애도 기간을 이유로 투표 연기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정부는 이를 거절하였고, 원주민들은 투표를 거부하며 보이콧을 벌였다. 투표는 중단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되어 97대 3의 찬반 비율로 독립 반대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원주민들은 합법적인 투표가 아니었다며 항의하였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분노로 항의하는 한편 당시 마크롱 대통령이 “뉴칼레도니아가 프랑스에 남아있으니 프랑스가 더 아름다워졌네요!”라는 발언으로 정신 나간 티배깅을 시전 한 것이 원주민들의 화를 더 돋웠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독립이 기각된 상태로 2023년 12월에 프랑스는 정부는 1998년 이후 이주한 사람들의 투표권도 인정하겠다는 법안을 발표하였다. 이들의 투표권을 인정한다면 원주민들과 이주민들과의 인구수 격차는 더 벌어져 뉴칼레도니아는 영원히 독립이 불가능해지며, 또한 원주민 차별 정책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경계한 원주민들은 분노하게 된다. 

뉴칼레도니아 폭력 시위

 하지만 이러한 원주민들의 분노가 1만 7천 km 떨어진 프랑스 의회까지 닿지는 않았고 해당 법안은 최종적으로 통과되었다. 이에 원주민들은 주민 투표를 재실시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이 시위는 폭력 사태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시위대 3명과 경찰 2명이 사망하였고 2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지금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와 관련된 3가지 사례들을 알아보았다. 당신이 지금껏 알고 있었던 정의로운 프랑스와는 다른 모습이지 않은가? 현재 프랑스와 영국과 같은 서부 열강들의 이미지 변신은 2차세계대전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유럽에는 서부 열강들의 잔혹한 제국주의를 가릴 정도로 절대적인 악이었던 나치 독일이 존재했다. 나치의 학살은 분명 끔찍하지만 이들과 싸운 연합국 세력은 덕분에 반대로 악과 싸운 영웅과 같은 이미지로 과거를 가릴 수 있었다. 


 알고 나면 다르게 보일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