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rom Sophi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in Jun 05. 2020

From _Sophie

In New Zealand

 







 간밤 내리던 비가 그치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산 중턱에 안개가 구름처럼 걸쳐 있습니다. 나무에 맺혀있던 것 인지 공기 중에 여전히 남아있는 빗줄기인지 모를 빗방울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흩날리긴 하지만 곧 해가 뜨면 그 마저도 자취를 감출 것이지요. 올해도 이렇게 무사히 봄이 오는 구나 마음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찾아옴과 함께 이 곳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바쁘던 도시 생활을 접고 조용한 시골로 14시간을 걸려 찾아온 데에는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던 시간을 잠깐 멈춰 세우고 싶은 이유가 컸습니다. 웰링턴에서의 마지막 두 달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나 바쁘게 흘러 일터에서 10분 거리의 워터프론트 바다를 보러 나가는 것도 사치였어요. 겨울을 핑계로, 피곤하다는 사실을 이유로 삼아 집, 가게, 집, 가게를 오고가며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던 것 같기도 합니다. 11개월의 웰링턴 생활을 마무리하며 조금 더 활기를 가졌었다면 어땠을까, 동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조금 더 늘리고 이별의 말들을 나누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다시 그 시간이 온다고 해도 저는 바쁘고 분주하게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 했을 것 같습니다.


 이곳이 주는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요. 직접 보지 않은 사람에게 글로써 이곳이 가진 풍경을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명상원이라고 이야기하기엔 아직 아무도 명상을 하지 않고, 절이라고 하기 에는 거주하는 스님이 한 분도 없는 이곳을 칭할 단어가 제 말 주머니에는 없는 것 같아요. ‘Mahamudra centre’. 이곳의 이름이 당분간은 제 인생에 있어 고유한 의미를 갖게 되겠죠. 양과 소가 풀을 뜯어먹는 언덕들 한 가운데 한국의 부처님들과 닮은 구석이 없는 불상들이 놓여있고 티벳에서나 볼 법한 색색의 깃발들이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이곳이 저는 꽤나 마음에 듭니다.

 이곳에 닿는 길은 쉽지 않았어요. 12시간을 좁고 추운 야간버스를 타고 웰링턴에서 오클랜드로 향했고, 또 그 곳에서 페리를 갈아타고 2시간 남짓을 더 떠나와야 도달할 수 있는 코로만델반도에서도 한 시간 정도를 더 차를 타고 들어와야만 했습니다. 수지가 저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면 우버도 사용할 수 없는 외딴 지역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한동안 고생했을지도 모릅니다. 페리선착장으로부터 코로만델 타운을 잇는 셔틀버스에서 ‘나는 콜빌이라는 마을로 가야한다.’고 이야기 했을 때 안내원이 짓던 표정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도와주겠다고는 했는데 적어도 40분을 더 차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고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난감함이 깃들어 있었죠. 큰 캐리어를 끌고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작은 동양인을 성가시게 여긴다는 것쯤은 말로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코로만델 타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던 저를 발견한 쪽은 수지였습니다. 9월 1일 11시 15분쯤 코로만델 타운에 위치한 visitor center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뒤 우리는 전화번호조차 교환하지 않았더군요. 그녀가 보내온 메일 속의 약속장소는 ‘셔틀버스에서 내리는 곳에 위치한 visitor center’였지만 실제로 버스정류장과 visitor center는 사이에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습니다. 15분 남짓 남아있는 시간 동안 커피나 한 잔 할까 태평하게 대로변으로 나가던 나를 누군가 불러 세웠습니다. ‘혹시 당신이 소희 인가요?’물으며 다가 온 수지에게 저는 ‘제가 소희인줄 어떻게 아셨나요?’라고 되물었어요. 누가 봐도 막 도시에서 도착한 여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면서 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제가 이곳 사람들과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는 모양이지요. 


 수지는 ‘mahamudra centre’의 매니저입니다. 나이는 오십대쯤? 아직 물어본 적은 없습니다. 이곳에서는 나이를 묻는 것보다 국적을 묻는 것이 더 자연스러우니까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뉴질랜드에서 보낸 그녀가 이곳에 자리 잡은지 어느새 5년을 넘어 6년째를 향해간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유독 반짝이는 눈빛의 소유자가 있지요. 그녀가 그렇습니다. 작고 마른 체구에 머리가 은빛으로 변해가고 있지만 그녀의 파란색 큰 눈을 마주보면 속을 꽤 뚫린 느낌을 받곤 합니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그녀를 익숙하게 느꼈던 이유는 천천히 그리고 분명히 귀에 꽂혀오는 억양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처음 들었을 때 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명치에서 시작되어 머리를 한 바퀴 휘감았다가 입 밖으로 나오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끝이 부드럽게 올라가는 그녀의 말소리는 높낮이가 완만한 이곳의 언덕들과 닮아 있었습니다. 제가 뉴질랜드의 1년을 통해 가장 크게 얻은 습관이 있다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입니다.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 단련해온 수험식 영어듣기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려던 일 년간의 노력들 덕분에 한 사람의 말투에는 표정과 성격이 녹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말하는 속도와 톤, 그리고 발음을 만들어내는 입모양 어느 하나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안에서 밖으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일까요. 무심코 밖으로 뱉어내는 그 것들을 누군가는 듣고 저처럼 성격이나 배경을 상상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굽은 등이 반듯하게 펴지는 듯 한 느낌을 받습니다. 

 당신도 아실지 모르겠어요. 제가 언제부턴가 소로우의 그 월든 숲에서 겨울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하나의 소망으로 품고 있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버몬트의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처럼 자연에 녹아들어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요. 그런 마음을 스스로도 철이 없다고 여길 만큼 저는 타고난 도시인 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감동적인 이유는 특별하기 때문이고, 특별함을 갖는 이유는 현실에서 실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믿어지시나요. 이곳 콜빌이라는 마을에서는 ‘더 나은 삶’과 ‘조화로운 삶’을 찾아 편리함 대신 공생을 택한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습니다. 개인이 많이 가지는 것 보다 모자란 것을 함께 나누는 편이 더 합리적이며 인간 역시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센터로 향하는 길에 우리는 ‘나이오미’라는 여성의 집에 잠시 들렀습니다. 외진 곳에 위치한 센터로는 택배를 받을 수 없어 타운 근처 그녀의 집으로 배달시킨 물건들을 가지러 가야했기 때문이죠. 차가 입구로 들어섰을 때 제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꽃으로 우거진 마당을 걸어 다니는 암탉들 이었습니다. 한국인 자원봉사자를 픽업해서 오는 길이라는 수지의 소개에 나이오미가 저에게 건낸 첫 물음은 ‘뉴질랜드에서 알래스카를 향해가는 철새들이 한국을 지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는 것이었죠. 그리고 제 앞에 차와 함께 한 권의 사진집을 펼쳐 놓으며 철원 근처 비무장 지대에 대한 이야기들을 꺼내놓았습니다. 시작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화주제는 레몬과 버섯을 가꾸는 것들로 이어졌습니다. 버섯 종자를 나무에 심고 기다리는 기간이 1년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녀는 그것들로부터 인내를 배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양봉을 하려고 노력중이지만 벌들이 스스로는 꿀을 만들지 못해 그들이 집을 지은 뒤 인간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며 벌들이 살 수 없는 지구에서는 인류도 살지 못 할 거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다과로 삼는 사람들이라니요. 

 뉴질랜드의 생활이 10개월을 접어들자 저는 이따금씩 이 1년의 생활의 끝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남섬의 퀸스타운에 있는 아그네스와 시몬을 만나러 갈 것인지, 데이브와 쉘리와 함께 뉴플리머스에서 남은 시간을 보낼 것인지 그도 아니면 유명한 지역 몇을 뽑아 여행다운 여행을 할 것인지 종종 저울질 하곤 했지요. 그런데 이 매력적인 후보군들에 구미가 당기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도 조용한 곳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것 같아요. 뉴질랜드의 자연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시골로 들어가 시간을 사치스럽게 흘려보낼 방법을 고민하다 woof와 help exchange를 떠올린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이곳에 와 닿을 수 있었으니까요. 





From_ Sohpie

0601.2020


매거진의 이전글 From_ Sophi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