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린의 야구, 세 번째.
'20 시즌 KIA에는 유난히 새 얼굴이 많이 보인다.
단순히 감독이 바뀌어서 리빌딩을 하기 때문에, 그 이유만은 아니다. 이전 감독의 (우승을 제외한) 유일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선수들의 군 문제 해결로 사실상 루키 시즌을 치르고 있는 어린 선수들이 많아졌고, 막 지명을 받은 프로 데뷔 1, 2년 차 고졸 선수들이 기대 이상의 쏠쏠한 활약을 선보이고 있다. 김선빈, 류지혁 등 주축으로 나서야 할 야수들의 부상과 팀의 버팀목이었던 에이스 양현종의 길어지는 부진 속에서 이 팀이 이만큼 버티는 건 어린 선수들이 해내는 1인분도 빼놓을 수 없다. 맷 윌리엄스 감독이 퓨쳐스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둔 어린 선수들을 과감하게 기용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주어진 기회에 자신을 어필하는 선수들이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고무적이다.
그중 내 눈에 띄는 선수는 투수 정해영과 내야수 김규성이다. 지난해 KIA의 1차 지명을 받아 루키 시즌을 보내고 있는 정해영과, 군 복무를 마친 후 사실상 프로 첫 시즌을 맞이한 김규성은 투수와 야수 파트에서 쏠쏠한 역할을 해주는 중이다. 이들의 활약은 당장의 빈틈을 메우는 것뿐만 아니라 KIA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고무적이다.
두 선수 중 오늘은 7월의 시작을 화려하게 장식한 정해영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미 수많은 기사에서 그의 이야기를 하고, 심지어 오늘자 기사로 신인왕 설레발까지 나왔지만 (제발 이런 건 장기적으로 봤으면 좋겠지만, 지난해 설레발 안 쳐서 더 좋은 기록에도 밀린 전상현과 이창진을 생각하면 차라리 이게 낫다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한 번은 정해영의 이야길 하고 싶어서.
내가 정해영을 처음 본 건 지난해 황금사자기 대회 8강전, 광주일고와 유신고의 경기였다. 당시 KIA는 투수 정해영과 외야수 박시원(현 NC) 중 한 명을 1차 지명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두 선수를 보기 위해 간 거였는데, 의도치 않게 소형준(현 kt)과 허윤동(현 삼성)의 아마 시절을 보게 된, 생각해 보면 참 운 좋은 직관이었다. 상술했듯 이날 내가 가장 기대한 선수는 단연 정해영이었다. 이 팀은 대대로 1차 지명에 타자를 뽑지 않았고, 박시원보다는 정해영이 유력한 1차 지명 후보로 손꼽혔기 때문이다.
마운드에 오른 정해영을 본 첫인상은 '피지컬이 좋다'였다. 189cm의 키에 제법 다부진 체형을 보며 구위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그래서 평균 구속이 130km/h 후반이라고 들었는데 구위가 좋고 제구가 잘 된다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마운드에 오른 정해영의 투구를 보고 있으니 기대가 금세 사그라들었다. 좋은 피지컬에 비해 볼끝에 힘이 없어 소위 말하는 '날린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덕에 맞으면 쉽게 외야로 뻗어 큼직한 플라이 타구가 됐다. 제구 역시 평가만큼 날카롭지 않아서, 당시 경기권 최강자였던 유신고 타자들은 어렵지 않게 정해영의 공을 치고 골라내며 루상으로 나갔다. 오히려 이날 눈에 띈 것은 안정적인 수비와 타격을 선보인 박시원, 그리고 상대 팀 선발이었던 허윤동과 경기 마무리를 위해 등판해 압도적인 구위를 선보인 소형준이었다.
그래서 정해영의 지명이 반가웠지만, 그 지명이 1차에 이뤄진 것은 사실 아쉬웠다. 충분히 박시원을 뽑은 후에도 정해영을 데려갈 수 있었을 거라는 계산을 나름대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팀이고, 피지컬이 좋으니 잘만 하면 발전하지 않을까, 당장 1군에서 보기는 어려울 테니 얼른 군 문제부터 해결하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정해영을 향한 기대는 잠시 접어뒀다.
정해영의 1군 콜업은 생각보다 빨리 이뤄졌다. 정해영은 지난 6월 25일, 롯데와의 더블헤더 1차전을 앞두고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1군에 합류했다. 당시 퓨쳐스에서 선발 수업 중이었던 그는 8경기에 등판해 2승 2패, 평균자책점 5.50이라는 썩 좋지 않은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등판을 거듭하며 기록이 조금씩 나아지는 상황이었고, 콜업 전 마지막 선발 등판이었던 6월 19일 고양과의 경기에서는 5이닝 7 피안타 2 볼넷 2 실점으로 한결 성장한 모습이긴 했다. 그러나 지난해 직접 봤던 정해영의 등판 내용이 영 아쉬웠던 나는 여전히 기대를 접고 1군 경험치를 먹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야속하게도 그치지 않은 비로 더블헤더 경기가 미뤄지며 이대로 정해영은 1군 밥만 먹고 다시 돌아가는 건 아닌가 싶었다.
예상과 달리 1군과 동행하던 정해영은 7월 1일, 한화와의 홈경기에서 정식으로 1군 마운드를 밟았다. 그의 프로 데뷔 첫 등판은 9회 초, KIA가 1:3으로 뒤처진 상황에서 이뤄졌다. 첫 타자 정은원을 상대한 정해영은 5구 만에 볼넷을 허용하며 루상에 주자를 내보냈다. 지난해 목동에서 봤을 때보다 구위는 나아졌지만 흔들리는 제구에 어쩔 수 없는 한숨이 나왔다. 물론 신인 투수가 처음으로 1군 마운드를 밟았으니 긴장했을 것도 고려했지만.
첫 타자를 내보낸 정해영은 두 번째 타자 오선진에게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승부했다. 142km/h의 직구로 스트라이크를 잡은 그는 1B 1S 상황에서 슬라이더를 던졌고, 이는 3루수 땅볼로 이어져 병살타를 완성했다. 루상을 깨끗하게 비우고 2 아웃을 잡은 그는 한 방이 있는 타자 김태균을 상대로 삼구삼진을 잡았다. 김태균이 배트를 내지 못한 3구째 직구 구속은 146km/h. 씩씩하게 1이닝을 틀어막은 정해영은 9회 말 타자들의 극적인 끝내기로 프로 데뷔전에서 승리를 챙긴 21번째 고졸 신인 투수가 됐다.
이후 정해영은 추격 상황에 마운드에 올라 쏠쏠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총 4경기에 등판한 그는 5.2이닝 3 피안타(1 피홈런) 1 볼넷 6 삼진 1 실점, ERA 1.59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기록 중이다. 지난 7월 10일 키움과의 경기에서는 연장에 돌입한 10회 초 마운드에 올라 2이닝 무실점으로 깔끔한 투구를 선보이며 시즌 두 번째 승리를 챙기기도 했다.
1차 지명 후보로 거론됐을 때부터 정해영은 느린 직구가 약점이 될 거라는 평이 많았다. 평균 구속 130km/h 후반의 구속으로 프로에서 살아남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도 아니고, 프로에 와서 구속을 올리는 건 그만한 디메리트가 따르기 때문이다. (물론 KIA에는 좋은 제구와 구위, 그리고 조금씩 상승한 구속으로 현재는 1군 필승조로 성장한 전상현, 문경찬 같은 선례가 있지만.) 이미 189cm라는 다부진 체격으로 체형이 완성됐기 때문에 프로에 와서 성장에 따른 구속 증가가 이뤄지기 어려울 거라는 예측도 있었다.
그러나 정해영은 아마에서 프로로 넘어온 현재, 눈에 띄는 구속 증가로 팬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현재 정해영의 직구 평균 구속은 143.4km/h로, 130km/h 대에 머물던 평균 구속을 적잖이 끌어올렸다. 지난 1일 한화전에서 김태균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직구는 146km/h, 8일 kt전에서 강백호를 상대로 삼진을 잡을 때 직구 역시 144km/h를 기록했다. 또한 10일 키움전에서 서건창을 상대로 헛스윙 삼진을 유도한 직구는 147km/h로 프로 데뷔 후 최고 구속을 찍기도 했다.
구속 상승과 더불어 눈에 띄는 부분은 정해영이 타자들과 피하지 않고 승부를 한다는 점이다. 정해영이 상대한 네 팀 중 한화를 제외한 세 팀은 현재 팀 타격 wRC+ 상위권의 kt, 키움, NC다. 이중 kt전에는 강백호-유한준으로 이어지는 클린업을, 키움전에서는 8번 타자 전병우로 시작해 3번 타자 이정후로 끝나는 상위 타선을 상대했다. NC전 역시 8번 타자 김찬형부터 모창민-김성욱-이명기로 이어지는 상위 타선과 맞붙었다. 다소 쉽지 않은 타자들을 상대로 정해영이 기록한 볼넷은 단 하나, 그것도 데뷔전이었던 1일 한화전에서 첫 타자 정은원을 상대로 내준 것이 전부다. 이처럼 강한 타자들을 상대로 자신 있게 자신의 공을 던지는 정해영의 모습은 "쫄지 않고 제 공을 던지는 것입니다"라고 당당히 이야기하던 2011년의 심동섭을 떠올리게 했다. (심동섭 제대 어디쯤 왔니. 보고 싶다.)
투수의 힘으로 먹고사는 팀이지만, '20 시즌 KIA 불펜의 뎁스는 얇디얇은 백지장이 따로 없다. 선발을 제외하고 단 일곱 명의 투수가 필승조, 추격조, 패전조까지 겸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정해영의 성장은 반갑기만 하다. 이 활약이 지속되면 좋겠지만 긴 시즌을 보내는 동안 크게 실점하며 무너지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기죽지 않고 자신의 공을 씩씩하게 던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런 정해영의 부진마저도 기껍게 다가올 것 같다. 몇 년 후에는 KIA 토종 오른손 선발이 되어 있을 테니, 불펜에서 경험치 먹는 중인 스무 살의 정해영을 조금 더 즐겁게 지켜봐야겠다.
(사진 출처: 본인 및 KIA 타이거즈 공식 홈페이지와 인스타그램, 기록 출처: STAT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