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린의 문화 생활.
아트원 2관도, 연극열전 극도, 장률을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 극을 선택한 이유의 1순위는 단연 장률이었기 때문에, 평소에 좋아하던 배우인 김여진 배우와 캐스팅을 맞춰 본 공연 첫날 관극하러 갔다. 연극열전은 늘 포스터 페어를 기가 막히게 뽑았고, 두 사람은 포스터 페어였기 때문에 그 합에 대한 기대도 꽤 컸다.
객석으로 들어가 마주한 무대는 굉장히 심플하고 서늘한 느낌을 줬다. 아무래도 여름이기에 냉방 시스템이 돌아가는 것도 한 몫 했겠지만. 이 극을 본 시기가 한겨울이라 난방이 틀어져 있었다면 조금 덥고 답답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나무 판자들을 세워 길게 이어 붙인 것처럼 생긴 무대는 몇 개의 직선으로만 이뤄져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보였다. 그 모습이 왠지 2년 전 제주 여행 때 봤던 유민미술관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극은 리비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연극의 기본 구조, 극의 시작이 어떻게 되는지 설명하는 리비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온 신경을 그에게 집중하게 한다. 극작가 혹은 내레이터로서 시작을 연 리비는 관객들에게 극의 구조를 알려줄 때와 달리 다소 불안정하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는 상태의 극작가와 재능의 뛰어남을 알지 못한 날것 그대로의 소년. 리비가 데클란의 그림을 보고 끌림을 느꼈던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데클란의 창의성과 천재성을 본 리비는 십여 년 전, 자신을 향해 찬사를 아끼지 않던 문단의 선배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데클란의 세상은 좁고 한정적이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재능의 가치를 알지 못했으며, 스스로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지켜야 할 사람까지 있다. 그런 데클란을 세상 밖으로 이끌고,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이끈 이는 리비다. 리비가 데클란에게 내민 손의 첫 의도가 순수한 열정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재능 있는 창작자에게는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들려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테니. 그리고 리비가 그랬듯 데클란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면서 조금씩 성장한다. 데클란의 세상은 리비로 인해 조금씩 넓어진다.
중간중간 리비가 말하는 극의 구조는 이후 이어질 전개를 예상하게 한다. 방향이 눈에 보인다는 건 다소 뻔하고 지루하게 늘어져 보인다는 위험성을 감수해야 하는데,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조금씩 벗어나 두 사람의 관계가 전개된다는 게 흥미롭다.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예술성을 발전시키는, 일종의 뮤즈 관계였던 리비와 데클란은 그 사이에 다른 감정이 끼어들면서 조금씩 엇나가고 틀어진다. 데클란은 이 감정을 사랑이라 말하고, 리비는 그런 감정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두 사람 모두 사랑이 아니라 생각했다. 온전치 못한 환경 속의 데클란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그림을 알아봐주고,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어주는 리비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사랑이라 착각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면 그건 리비의 것이라 여겼다. 리비는 이미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빠르게 선을 긋고 도망친 것 같아서.
데클란을 향한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리비에게 남은 건 자신의 창작물뿐이다. 그러나 그 창작물을 리비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극중 리비가 쓰는 글은 무대를 스크린 삼아 자막으로 띄워지는데, 등장인물은 각색 하나 없이 데클란의 말을 그대로 읊는다. 시작은 데클란의 잠재력이었으나, 작가로서의 욕심이 더해지며 이 비극적 현실을 '알려야 한다'는 의식과 사명이 조금씩 커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의식과 사명감으로 포장해 데클란의 삶을 그대로 무대에 옮기고, 데클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삶을 도둑질한 모양새가 되고 만다. 누가 봐도 자신인 인물이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는데, 그게 메시지를 위한 선택이라며 대단히 극적인 연출이라 표현한다면 분노하지 않을 자가 얼마나 있을까.
극중 리비의 모습은 최근 문학계의 큰 이슈인 김봉곤 작가 사태를 떠올리게 했다. 데클란을 보면서 트위터를 통해 자신이 실존하는 사람이라며 외치던 이들이 겹쳐졌다.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이유로 실존 인물의 삶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상황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의식이 담긴 목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작가들이 그 삶이 일상인 이들에게 휘두른 폭력이 유독 잔인하게 느껴졌다. 데클란의 말처럼 그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건 어떤 극적인 상황이 만들어져서가 아닌데.
그들의 일상은 대개 어두웠고, 다음이 없었으며, 그렇기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이를 강조하고, 가장 큰 비극의 모습이라며 보여주는 건 너무나도 허울 좋은 이야기일 뿐이다. 메시지를 전하고 깨우침을 준다는 것도 결국, 그 세상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발상일 터다. 수십, 수백 번의 공연이 올라가는 동안 그 일상 속 이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어둡고 (보통의 사람들이 말하는) 절망에 빠져 있는데.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는 걸 기다리기에 그들의 일상은 이미 위태롭다. 누군가를 깨우치는 것보다 현실적인 방안이 우선은 아니었을까. 리비가 극 바깥의, 데클란의 현실에 조금 더 손을 뻗어줬다면, 그 결말이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는 게 업이었고, 여전히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공교롭게도 관극 며칠 전 퓰리처상 사진전에 다녀왔고, 그곳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됐기에 더더욱. 내가 두드리는 키보드로 완성된 문장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폭력적인 말이 될 수도 있다고 거듭 인지한다. 말로만 떠드는 것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으며,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전시하는 건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무대 위 장률은 프라이드 속 천진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가진 올리버지만, 킬롤로지에서 보여준 폴 특유의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소년미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마우스피스의 데클란은 장률이 가진 소년미에 감정이 극대화되는 과정까지 더해져 보는 내내 데클란에게 빠져들고 공감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어쩌면 조금 더 나아지고 모두 다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 데클란. 그런 데클란이 더욱 더 깊은 절망을 바라보는 게 너무나도 크게 와 닿아서. 그래서 리비의 모습이 더욱 위선적으로 보였던 걸지도 모른다. 김여진 배우의 연기 역시 나무랄 곳 없었으나 서너 번 대사를 더듬는 것이 아쉬웠다. 리비의 캐릭터성과 맞아 떨어져서 넘어갈 수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몇몇 방백에서도 대사를 유려하게 소화하지 못해 몰입이 깨지곤 해서.
무엇보다 좋았던 건 무대 전체를 큰 스크린으로 활용해 리비의 극중 대사와 데클란의 말이 교차되게 하는 연출이었다. 리비가 극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면서 하는 행동들이 데클란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 눈에 확 보여서. 단조로운 무대에 더해진 대사 자막들로 해당 장면들은 스크린에서 보는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조금 더 대사를 길게 곱씹어보고 싶어서, 다른 배우들의 해석도 궁금해서. 아마 최소 한 번은 더 볼 생각이다. 비단 글이 아니어도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예술을 향유하는 걸 즐기는 사람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