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14 pm 5:46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글자를 그적이고,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었는데 시랍시고 소설이랍시고 냅다 이야기를 만들곤 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초등학교, 그땐 국민학교 3,4학년 정도 되었을까. 아마도 선생님이 숙제로 내줬을 일기는 1학년때부터 시작되어 평생의 숙제처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별 볼일 없는 인생만 일기에 남기기가 시시했던지 나는 그렇게 다른 이야기를 써내려간 것 같다. 그땐 그저 나만의 비밀스럽고 요상한 습성이자 남모를 취미같은 거라고 여겼다. 돈도 안들고, 종이와 펜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나만의 놀이라고.
대학을 안가고 산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살겠다며 난생 처음 말도 안되는 반항을 했던 고3 때나, 방송작가 일을 극구 반대하며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라던 아빠한테 나는 그냥 글 쓰는 일이 좋아요, 꼭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거예요, 하며 대들었을 때도 아빠가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서운해하기만 했었다. 아빠는 그런 거 모른다고, 온몸에 피가 들끓어 어디든 쏟아내지 않으면 터질 것만 같은 열정을 품고 사는 게 어떤 건지. 아빠는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고 감히 생각했었다. 하루하루 돈벌이가 전부인 지루하고 피곤한 인생을 살고 있는 아빠가 열정이니, 꿈이니 하는 뜬구름을 잡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모른다고.
그런 아빠의 일기를 발견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다.
안방 옷장 맨 아래 서랍장에 빼곡하게 쌓여있던 낡고 빛바랜 노트들.
내 노트북 속 일기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양이었고, 삭제 버튼만 누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내 것들과는 전혀 다르게 눈으로 보면서 만질 수 있고 손끝으로 글자의 깊이를 느낄 수 있으며 그날의 숨결까지 고스란히 묻어있는 수십 권의 일기장이 있었다.
난 내킬 때마다 끄적였지만, 아빠는 매일을 그렇게 기록해왔었다. 아빠의 지난 시간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그 속에 살아 있었다. 몇 장을 넘겨보다가 벅찬 마음에 이내 일기장을 덮어버렸다. 아빠가 살아온 그 동안의 세월이 내게로 넘쳐흘러버릴 것만 같아서. 담아두기엔 아빠의 생이 너무 버거웠고, 나는 너무 얄팍했다.
너무 많아서 이사할 때마다 아빠 몰래 버렸어.
그래도 많아서 놓을 곳이 없었다던 엄마는 남은 일기장을 수십 년째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있었다. 신혼 초에 호기심이 일어 조금씩 읽어봤다고. 다 보진 못했지만 이 남자의 고단한 삶이 너무 불쌍해서 떠날 생각도 못하고 지금껏 이렇게 산 건지도 모르겠다고.
아빠의 일기장 곳곳에는 투박한 그림의 흔적들도 남아 있었다. 표정도, 눈물도, 웃음도, 감정이라곤 없는 줄 알았던 아빠가 서툰 감정들을 이곳에 남겨두었다. 일기라고 불릴 글을 통해, 낙서라 불릴 그림들을 통해. 응어리지고 어디에 내보이지도 못할 치부처럼 꼭꼭 숨겨둔 채로.
아빠는 그런 거 모른다고 했던 내 자신에게 되묻는다. 넌 그런 게 뭔 줄 아냐고.
아빠도 분명 나와 같은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인생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고뇌 가득한 머릿속을 비우려 우수찬 눈으로 펜을 들었을 때가. 복잡한 세상을 벗어나고 싶어 막연히 현실로부터 도망치려던 때가. 아빠는 나보다 더 무거운 인생의 무게를 견뎠을 것이고, 더 복잡한 세상을 살았을 테지만 결국 도망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보다 더 펜과 종이를 찾았을 것이다. 나보다 더 하고 싶었던 말이, 그래서 쏟아내고 싶었던 글자들이 넘쳐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모든 마음들과 순간들과 감정들을 글자 속에 숨긴 채 조용히 서랍장 깊숙한 곳에 잠재우며 살고 있었다.
아빠의 일기는 열두 살에 시작해서 서른 중반쯤에 멈춰있었다.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더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진 못하지만 아빠의 일기를 멈추게 한 게 나라는 건 분명했다. 밀려나지 않도록 자리를 잡아야 했고, 아이들 입에 넣어줄 거, 입혀줄 게 더 중요했던 아빠에게 펜을 들 시간조차 없었을 것이다. 감정에 휘둘릴 여유따위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책임지게 된 어린 가장으로 살아 온 삶이 성인이 되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또 다른 가장이 되어 살아갔던 삶이 되기까지. 아빠가 오롯이 자신으로 살았던 순간이 과연 몇 번 있었을까.
아빠의 일기를 본 후, 나는 아빠한테 글쓰는 일이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아빠의 일기를 봤다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아빠의 못 다한 말들의 줄임표가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어쩌면 숨소리를 간직한 채 잠들어있는 서랍장 속 일기장들이 깨어나서 나에게 호통칠까 두려웠다. 대체 네가 뭘 아느냐고.
그래서 함부로 누군가의 삶을, 감정을, 꿈을 다 아는 것처럼 굴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나의 슬픔이 가장 깊고, 나의 역경이 가장 모질며, 나의 열정이 가장 뜨겁고, 나의 꿈이 가장 아름다운 것처럼 어리석게 굴지 않기로. 그렇게 영원한 비밀처럼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러다 작년 이맘 때, 할머니가 이제는 이걸 네가 간직해줬으면 한다며 노트 한 권을 건네주셨다. 너무 오래되고 낡아 종이끝이 바스락 부서지던 노트에는 그림이 곁들어진 시들이 적혀 있었다. 아빠의 일기장보다 훨씬 오래된 할아버지의 노트였다.
네 할아버지가 참 글자를 잘 썼어. 그림도 무척 잘 그리고. 조용히 앉아 늘 뭔가 적는 걸 좋아했었지.
아빠가 아홉살, 할머니가 서른살에 돌아가셨다던 할아버지였다. 너무 일찍 간 게 야속해서 다 버리고 이것밖에 남기지 않았다고. 이것마저 버리면 할아버지가 정말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까봐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간직해둔 거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할아버지의 짧고 아련한 생을 오래된 노트 한 권에 소중하게 받아들고 돌아왔다. 마음이 한결 후련하면서도 무거워졌던 날이었다.
오늘도 노트북을 켜고 깜빡이는 커서를 따라 글자들을 써내려간다.
나에겐 오늘이지만, 아빠에겐 어제와 같은, 또 할아버지의 오랜 기억과도 같은 시간이 글자들을 따라 차곡히 쌓여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