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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Jun 27. 2022

영어는 안 늘고 거짓말만 늘어요

지인이 매일 아침 15분 정도 짧게 전화영어를 한다고 했다. 주로 수업을 하면 한 시간 단위로 하는 나에게 15분은 너무도 짧게 느껴졌다. 15분 안에 뭘 배울수는 있냐고 물었더니 본인이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거의 원어민 선생님 혼자서 이야기를 하다가 끝난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하는 게 어디냐고, 노력과 도전정신이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근데 영어는 안 늘고 거짓말만 늘어서 걱정이에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영어를 배우는데 거짓말을 한다고? 대체 왜?

- 선생님이 뭘 물어보는데 영어로 대답을 못하니까 자꾸 거짓말을 하게 돼요.


문득 영어로 인사말이나 겨우 할 수 있던 시절, 외국인 친구들에게 거짓말로 대답하던 열일곱살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휴일 즐겁게 보냈냐고 물어보면 즐겁지 않았어도 "Yes."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피곤하냐고 물어봐도 그렇다고 하면 왜 피곤하냐고 되물을 게 뻔하니 "No"라고 답했다. 그나마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 다행이지 'How'로 시작하는 질문을 할까봐 어찌나 맘을 졸였는지 생각만 해도 피곤한 시절이었다.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한 적도 많다. 뉘앙스가 살짝 다르면서 내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생각해내기에 실시간으로 흐르는 대화의 속도는 너무 빨랐으므로 좋지 않아도 'Nice'로, 맛있지 않아도 'Delicious'라고 말했다. 대답하기가 부담스러워서, 이야기가 길어질까봐, 내 의견을 물어볼까봐 등등 거짓말을 하게 되는 이유는 다양했다. 이제 영어가 좀 편해졌다고 등 뒤에 식은 땀이 나도록 거짓말 하던 그 시절을 벌써 잊어버리다니. 나의 어두운 과거를 소환하고 나서야 지인의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 "Do you like sports(스포츠 좋아해요)?"라고 물으면 '직접 하는 건 별로 안좋아하는데 보는 건 좋아한다.'라고 답을 하고 싶지만 머리속에서 그렇게 대답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신호를 보낸다. 신호를 받으면 자동으로 "Yes!"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복잡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스포츠를 좋아한다고 답했으나 뒤따르는 질문은 너무 당연하고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 What kind of sports do you like(어떤 스포츠 좋아하는데요)?

- Hmm... Soccer.

- Wow. How many times do you play soccer a week(그럼 일주일에 축구 몇 번 정도해요)?

- ...


질문 세례는 눈치 없이 이어진다. 그렇게 진땀을 빼며 15분을 보낸다고 했다. 나에게는 너무도 짧은 15분이 그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수개월째 전화영어를 이어오는 이유는 그렇게라도 해야 영어의 끈을 놓지 않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영어와 한국인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떼어내고 싶어도 떼어낼 수 없는 애증의 관계.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서도 이런 상태에 놓인 학생이 꽤 많았다. 하긴 싫은데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그런 상태. 난 그들이 잡고 있는 얇은 줄을 놓지 않도록, 또 그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열의를 다해 영어가 가진 장점을 모조리 끌어다 앞에 풀어 놓았다. 내가 영어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열변을 토할 때 그들은 얼마나 진땀을 흘리고 있을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초조함에 손을 떨며 외국인과 대화하던 내 모습을 까마득히 잊었던 것처럼.


처음 들었을 땐 너무 재미있어서 정신 없이 웃기만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웃픈 현실이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영어를 배워야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웃프다. 영어학습 옹호자로서 이런 현실을 비판하고 싶진 않다. 그렇게 해서라도 매일 전화를 붙들고 영어로 몇 마디라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영어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붙이고 영어를 즐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조금씩 계속하다 보면 거짓말뿐 아니라 영어가 쑥쑥 느는 날도 반드시 올 테니. 거짓말도 때론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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