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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ㅈ가 Aug 06. 2020

<죽음의 수용소에서> 다시 읽어볼만한 인용문

빅터 프랭크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3가지 방식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을수록 더욱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며, 갈구하면 할수록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물.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인간에게 빼앗아갈 수 없는 유일한 한가지는,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수가 없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말고, 삶으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고 있고 어떻게 답할지 매일 생각해야 한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잇는 기회가 숨어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삶의 의미에는 고통과 죽음, 궁핍과 시련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 주는 본능도 없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전통도 없다. 어떤 때는 그 자신조차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전체주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고 있는 고유한 의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도록 한다. 무엇을 위해, 무엇에 대해, 혹은 누구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환자 스스로의 판단에 맡긴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정신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잊을수록 더욱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인간이 모든 진화과정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세계를 초월하는 또 다른 차원이 있을 수 있단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인간이 겪는 시련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또 다른 차원의 세계 말입니다.”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신경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들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다.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행복해야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자살에 실패한 지 몇 주일 후에, 몇 달 후에, 몇 년 후에, 그들은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에도 자기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고, 의문에 대한 해답이 있었으며, 삶에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그런 일이 당신에게 조만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우선은 그런 일이 일어나는 날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살아야 하고, 그런 날이 밝아오는 것을 보기 위해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살아남아야 할 책임감이 당신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겁니다.”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최종적인 의미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미국에는 자신의 시련을 자랑스러워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품위 있는 것으로 만들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환자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불행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과거에 실현시킨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그 사람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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