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검은 꽃>은 1905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조선엔 희망이 없다며, 불확실한 희망에 이끌려 타국을 기웃거리는 1,033명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멕시코 이민자를 모집하는 ‘대륙식민회사’ 의 솔깃한 광고를 보고 일포드호에 탑승한다. 망조가 팽배한 조선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에네켄 농장이었다. 에네켄 농장에서 4년간의 노예 생활, 그리고 그 이후 목적지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 나라도 단체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들의 삶을 그려낸 작품이 <검은 꽃> 이다.
(지금껏 읽었던) 김영하 작가의 소설엔 판타지도, 기막힌 반전도 없다. 이쯤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바램은 번번히 빗나간다. 영원한 선과 악도 없으며 선과 악은 독자가 정의할 뿐이다. 간결한 문체이지만 농도 깊게 그 상황을 그려낸다. 본인이 구현하고자 하는 소설 속 세상을 막힘없이 전달한다.
김영하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소설을 끝낼 때마다 작가는 자신이 만든 세계의 명예시민이 되는 영광을 (홀로) 누린다. 지금 이 순간 나는 1905년생이다.”
작가가 자신이 만든 세계의 명예시민이라면, 독자는 그 세계의 여행객이다. 여행사가 엄선한 패키지 코스를 여행객이 따라가듯, 독자는 작가가 닦아 놓은 길을 거침없이 정주행한다. 여행자는 그 세계를 잘 알지 못하며, 잘 알 수도 없다. ‘그랬다더라’는 얘기를 주워 담을 뿐이다. 그렇다고 여행이 무의미한건 아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곳에 발을 디디는 과정 자체가 의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