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과수 폭포, 아르헨티나
이과수 공항에 내려서 버스 티켓을 끊고 숙소의 주소를 보여주었더니, 숲 한가운데에 내려준다. 실제 숲은 아니고 숲 속처럼 나무가 많은 이곳은 주변이 모두 중소 규모의 인과 호텔들만 있는 조금 고립된 지역이었다. 체크인은 했지만 어디로 가야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심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빨간 우산을 양산처럼 쓰고 용감하게 길을 나서 보았으나, 맨다리를 태울 듯이 따가운 햇빛에 꼬리를 내리고 돌아왔다. 별 수 없이 이곳에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해야 할 것 같다. 피자(380페소)+수제 맥주(150페소)를 시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나름 좋다. 나무 그늘은 시원했고 키 큰 나무들로 뒤덮인 수영장 뷰도 좋고, 전망 좋은 팬시 레스토랑에 와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바람도 선들 불고. 이곳에 며칠 묵으면서 수영도 하고, 맥주 마시며 글도 쓰며 유유자적해도 좋을 것 같다. 음악까지 빵빵하다.
수영장 가에는 비치 배드들이 늘어서 있고, 진짜 침대 같은 매트리스가 하얀 반투명 천으로 된 캐노피를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 팬시해 보였다.
저렇게 온몸을 햇빛에 드러내고 수영장 가에 누워 있는 이들을 부럽게 바라본다. 왠지 그들은 좋은 호텔의 투숙객들이고, 나는 잠시 지나가는 사람인 것처럼 그곳에 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햇빛이 너무 강한 이유도 있었지만 수영복도 없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호스텔에 짐을 맡겨두고 정말 간단한 것만 챙겨 오면서, 수영복이 필요하리라는 건 생각도 못해봤다. 나도 저 서양 사람들처럼 햇빛에 그을릴 것을 걱정하지 않고 한껏 햇빛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피자와 맥주를 앞에 둔 내가 지금 그들보다 이곳을 덜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기미를 걱정할 필요 없는 백인이라면 저렇게 해보고 싶다.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즐기고 있는 그들, 어떤 이는 비치 배드에 엎드려서, 어떤 이는 물이 찰박찰박 잠길만한 수영장 데크에 누워, 어떤 이는 하얀 커튼이 날리는 그늘 매트리스에 누워 무척 편안한 모습이다.
누군가 ‘남미 사랑’ 단톡방에서 때늦은 정보를 주었다. 브라질 쪽 이과수로 가면 오후 5시까지 입장 가능하니 충분히 돌아보고, 내일 아침 9시 타임 보트 예약을 하면 될 거라고. 브라질이 여기서 그렇게 가깝단 말인가? 그러나 이미 늦었네. 그리고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네.
맥주가 은근히 센지 알딸딸하다. 방금 웨이트리스가 와서 맥주는 다 마신 거냐고 해서 한 잔 더 달라고 했다. 해질 때까지, 저녁까지 오늘은 이렇게 앉아서 맥주에 취해볼 일이다. 취기가 오르니 잠이 오려고 한다. 이대로 한 숨 잤으면 딱 좋겠다. 수영장 가에서 잘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내일 7시 반쯤 이 앞에서 미니밴을 타면 투어가 3-4시쯤 끝나 호텔에 돌아올 것이다. 씻고 짐 챙겨서 공항으로 가면 완벽한 스케줄이 된다. 이과수 폭포 보트 예약을 안 했는데 탈 수 있을까? 난 여기 폭포를 보러 온 건지, 그냥 또 하나의 여행지처럼 이 호스텔에 들른 건지 모르겠다. 폭포를 보기 전까지는 실감을 못하겠다.
폭포 아래의 보트 투어는 오늘 못한다고 한다. 강의 수량이 적어서 배를 띄우지 못한다고 했다. 아침 7시 30분 버스를 타고 갔는데, 2시간 10분짜리 보트 투어가 무산되어 시간은 넉넉해졌다. 부에노스 아이레스행 비행기 출발 시간이 오후 7시 44분이므로.
입장해서 폭포로 가는 기차를 타고 제일 위까지 올라가서, 사람들을 따라 긴 철교를 건넜다. 거기서부터는 길이 모두 철교로 되어있다. 아침 풍경은 고요하고 따스하고 평화로웠다. 밀림과 강이 합쳐진 것 같은 풍경, 즐기기에 참 좋았다.
이번 여행에서 봉 빼는 아이템 중 하나가 빨간 우산이다. 예쁜 색깔 때문에 양산으로도 손색이 없어서 도시를 돌아다닐 때도 이렇게 산이나 강을 돌아다닐 때도, 내 피부의 너무나 훌륭한 보호자가 되어주고 있다.
20분쯤 그렇게 걸었을까?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드디어 폭포가 모습을 드러내나 보다. 여러 군데 폭포가 있다고, 그중 최고가 ‘Diablo, 악마의 목구멍’이라고 들었다. 그 여러 개 폭포들 중 이곳은 어디일까? 하며 접근하는데 구부러진 철교 모퉁이를 돌았더니, 갑자기 거대한 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고도 없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확 들어온 '디아블로'였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물을 뒤집어쓰며 폭포를 마주했다. 이건 물줄기가 아니다. 뭐라고 표현할 수도 없다. 물 폭탄도 아니고 거대한 폭포 더미가 마치 눈사태처럼, 산사태처럼 밀려온다. 그것도 숨 쉴 틈도 없이, 끝도 없이. 그 거대한 사태로, 폭포 아래서는 자욱한 물안개가 형체모를 심연처럼 일렁인다. 말 그대로 악마의 목구멍처럼, 모든 것을 삼켜버리겠다는 듯, 지옥으로 떨어지는 입구인 것처럼.
처음엔 사진을 찍을 생각조차 없었다. 폭포 근처로 너무나 많은 물이 쏟아져 내렸고, 휴대폰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마음은 이미 그 폭포에 압도되어버렸다. 사진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한참 그러다 마침내 난 휴대폰을 꺼내 폭포를 동영상으로 찍기도 하고 셀카를 찍기도 했다.
휴대폰은 꺼내자마자 나처럼 물에 흠뻑 젖어버렸다. 떨어지는 폭포를 보면, 마치 그것들이 나를 향해 육박해오고 있는 것 같다. 3D 영화 같기도 했다.
‘이과수를 보면 넌 울게 될 거야.’라던 에밀리오의 말이 떠올랐다. 그랬다. 나는 울고 있었다. 지금 이 폭포의 모습은, 혹은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느낌은 사진으로도, 비디오로도 어차피 담기 어렵다. 그렇다면 나의 이 벅찬 감정을 담자. 그래서 나는 울고 있는 내 모습을, 그리고 폭포를 돌아가며 동영상으로 찍었다.
좋은 생각이었다. 나중에 셀카를 보니 폭포수에 밀린 선크림이 내 표정을 따라 뭉쳐져서, 영락 눈곱처럼 두 눈가에 커다랗게 매달려 있었다. 그 때문에 조금 웃기기는 했지만 사진은 생각보다 잘 나왔다. 정우는 너무 예쁘다고, 대체 무슨 광고를 찍고 있는 거냐고, 선크림 광고 찍는 거냐고 했다. 폭포를 보고 우는 내 모습이 귀엽다고도 했다. 그래, 뭔 소린들 못할까.
그렇게 벅찬 느낌을 뒤로하고 돌아서 걷는데 마치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다. 따스한 햇빛, 맑은 공기, 아름다운 풍경들이 이어졌다. 아래쪽에도 계속 여러 군데 크고 작은 폭포들이 나타났고,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에 이름 모를 작은 숲 속 동물들도 보였다.
이과수는 그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도 전혀 아깝지 않은, 나를 울린 최초의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