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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Sep 23. 2023

로렌스, 애니웨이

                - 사랑이 감당할 수 있는 현실의 무게란

  

  연인의 정체성이 변해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어느 날 그 또는 그녀가 불구가 되어도, 직장을 잃고 몇 년 동안 취직에 실패해도, 중병에 걸리거나 정신 분열 증상을 보여도 그 사랑을 계속 지켜갈 수 있을까? 지켜야 하는 것은 당위이고 실제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극복해야 할 난관은 현실이다. 현실은 온갖 짜증과 분노, 다툼과 멸시, 버거운 청구서와 허드렛일이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타인의 시선과 고통을 견뎌야 한다.    

  

  하물며 이 영화에서처럼 연인이 성 정체성을 바꾸겠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프레드(수잔 클레망)의 연인 로렌스(멜빌 푸포)는 35세 생일을 맞아, 지금부터는 여자로 살아가겠다고 선언한다. 마음속에 여자이고 싶은 열망이 들끓는데 남자로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은 거짓이었다고, 이제는 진정한 나로, 여자로 살겠다고 한다. 이 영화는 로렌스의 이와 같은 실존적 선택에 대해, 그리고 그 선택의 대척점에 있는 그의 연인 프레드를 통해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는 현실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2013년 개봉 당시 신예 감독이었던 돌란 자비에의 감각적인 이 영화는 깊이 있는 주제뿐만 아니라 기발하고 매력적인 화면 구성으로 관객을 흥분시킨다. 프레드가 소파에 앉아있는 거실에 엄청난 물이 벼락처럼 쏟아져 내리는 장면, 눈 덮인 마을을 걸어가는 로렌스와 프레드 위로 하늘에서 형형색색의 옷가지들이 눈처럼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장면 등은 두 사람의 극적인 감정을 센세이셔널한 영상으로 담아내고 있다. 사실 처음에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각적 충격에 더 마음을 빼앗겼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로렌스와 프레드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출처 : 로렌스 애니웨이 | 다음영화 (daum.net) 에서 이미지 차용


  남자로 사랑했던 사람이 어느 날 여자로 살고 싶다고, 여자로 살아갈 거라고 선언했을 때 그녀, 프레드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자와 남자로 사랑했던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35년 만에 여자로 살겠다는 것은 오랫동안 깊은 고민과 갈등 속에서 행한 로렌스의 실존적 선택이지만, 그것은 남자인 그를 사랑하는 프레드의 삶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크게는 그것이 두 사람의 성 정체성과 관련해 정합하지 않은 때문이다. 다음으로 프레드는 로렌스의 선택, 아니 선언에 대해 아무런 주체적인 선택권이 없다는 것이다.     


  로렌스는 여자로 살겠다는 것이 남자를 사랑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자기는 여전히 여자를 사랑하고 그 여자는 바로 프레드라고 함께 있어달라고 간청한다. 프레드는 로렌스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그런 결심을 인정해 주고 함께 헤쳐 나가기로 한다. 그러나 프레드에게 이것은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라 차마 사랑을 놓지 못하는 수동적 순응일 뿐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큰 것을 인정하더라도, 프레드의 이런 결심은 현실의 무게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프레드는 그냥 로렌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중요한 것이고 자기만 로렌스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수용해 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로렌스가 선택한 그 정체성으로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겪어내려면 얼마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 것인지, 사랑하므로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이 결국은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어야 하는 것임을 프레드는 상상조차 못 했던 것이다.   

  

  프레드가 간과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삶을 버리기에는 그것에 대한 그녀의 애착이 의외로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계산으로 머뭇거리는 사람들보다 직면한 현실적 어려움을 참아내기가 오히려 더 어려운 것이다. 로렌스에게 여자 가발을 선물해 주려는 프레드를 동생이 어이없어 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는 우리는 뭐 지극히 정상이야?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고리타분하게 그래? 하늘 아래 한계는 없는 거야.”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동생이나 다른 사람들을 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고 싶은 프레드의 자기 최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레드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그저 로렌스를 위해 그가 여장하는 것을 지켜봐 주며 예쁘다고 말해주고, 서로의 선택에 대해 “우리가 자랑스러워”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달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로렌스에게 말한다. 

  “함께 웃을 일이 없어.” 

  이제 그녀는 로렌스와 함께 있으면 온전한 자기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 삶의 의미와 기쁨은 서로 상반되는 지점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출처 : 로렌스 애니웨이 | 다음영화 (daum.net)


  밖에 나간 로렌스가 얻어맞고 들어오는 것을 지켜봐야 하고 함께 외출하면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혹은 경멸 어린 시선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프레드에게 삶의 기쁨은 사라지고 끝없는 자기희생과 그에 따른 불만이 그 자리를 채운다. 더 이상 그런 삶을 참을 수 없어 떠나기로 결심한 프레드는 그녀를 붙잡는 로렌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널 위해 내 인생을 다 버리라는 거야?”



출처 : 로렌스 애니웨이 | 다음영화 (daum.net)


  로렌스 같은 사람이 친구이거나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었을 때,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그냥 그들의 정체성을 쿨하게 인정해 주거나 마음속으로만 작은 편견을 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가 나의 연인이거나 가족이었을 때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자식의 모든 것을 이타적인 사랑으로 감싸기 마련인 부모에게조차도 그것은 너무 가혹해서 받아들이기 힘든데 하물며 연인은 부모처럼 이타적인 존재도 아니다. 연인이나 부부의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우선적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애초에 프레드가 감당할 수 있는 몫이 아니었다.      


  선택을 할 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예상되는 모든 어려움과 책임을 다 펼쳐서 꼼꼼히 훑어본 후에,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불쑥 결정하고 뛰어들면 결국 예측하지 못했던 현실의 벽에서 더 쉽게 좌절하고 더 쉽게 도망친다. 예측 가능한 실패라는 것이다. 현실이 아닌 사랑을 선택했으니, 미리 따져보고 포기한 사람보다 더 용감하다고, 더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지해서 용감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들을 가져볼 수 있는 것이다.     


   프레드도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위한 선택이었다면 로렌스와 똑같이 그 모든 고난을 이겨냈을 것이다. 그러나 프레드에게는 자기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가 따로 있고 그것에 따른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한다. 지극한 사랑에도 견뎌낼 수 없는 현실이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실에 굴복했다고 해서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을까? 로렌스도, 프레드도 서로 진정한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고 누가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평가하기는 쉽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 명쾌하게 단언하는 것이 마치 자신이 똑똑하다는 반증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도 과연 그럴까? 평론가 신형철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예로 들어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외도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어떤 조건 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중략) 어떤 사람도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는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

             출처 -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마음산책, p. 65.    


  천만 명의 삶, 또는 그 단면에는 천만 개의 서사가 존재한다. 단순히 몇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해서 해당 칸에 던져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프레드는 로렌스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정체성을 바꾸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야 할까? 아니면 나 대신 그 자신의 정체성을 택한 것이니, 더 돌아볼 것도 없다고 명쾌하게 정리하고 떠났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이 영화의 서사가, 그토록 고통스럽고 치열했던 그들의 내면과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우리에겐 없었을 것이다. 영화나 소설, 삶에 대한 판타지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만을 선택적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분노까지도 통렬하게 겪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렌스와 프레드가 함께 겪었던 사랑과 현실의 무게 사이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길어진 데에는 그 나름의 당위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삶 또한 그렇다. 단순하고 안온한 삶, 몇 줄로 요약할 수 있는 명쾌한 삶을 원한다면, 성장하면서 함께 키워온 내 삶에 대한 꿈, 실패와 좌절, 갈등과 분노, 모험과 불같은 열정 따위가 들끓는 저편의 삶은 쳐다보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쪽을 선택한 로렌스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 그의 정체성이 어떤 것이든, 자기의 선택에 따른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서는 자기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보다는 스스로 선택한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이의 긍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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