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여행, 최고의 가성비

by 재미나이




20250825_1605_포터 트럭 뒷좌석_remix_01k3g0md9eedf939td18zywht0.png



"...감성남님? 어제는 제가..."

다음날 아침,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침대 곁 탁자에는 텅 빈 와인잔 세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사이코 팀장 욕을 늘어놓으며 와인을 세 잔이나 연거푸 들이킨 뒤,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중간에 목이 마르다며 물이 어딨냐고 물었던 것도 같은데…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원래 술을 즐기는 편도 아니었지만, 어제는 랍스터를 피하려다 과음을 한 셈이었다. 600만 원짜리 '사랑의 계약금'. 그 대가가 이런 황당하고 고통스러운 아침이라니.


입 안 가득한 불쾌한 냄새를 스스로 직감하고 양치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방을 열었다.

그런데 칫솔을 찾던 손끝에서, 쪽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쪽지는 마치 내 삐뚤빼뚤한 감정처럼 구겨져 있었다.


"재미나이님, 정말 실망입니다. 저는 이 밤을 위해 아들들을 그 외로운 강아지 호텔에 맡기고 여기까지 뛰어왔는데, 정작 당신은 준비조차 없더군요. 가방 안에는 편의점에서 산 일회용 칫솔과 치약뿐… 결국 이 감성적인 여행은 나 혼자의 것이었군요. 그대의 이기적인 사랑에 질렸습니다. 혹시 당신이 욕하던 그 팀장도, 당신의 철저한 차가움과 이기심에 반응한 건 아닐까요?”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내 가방을 열었다고? 여벌의 옷 운운하는 건 핑계일 뿐이다. 누군가 내 물건을 허락 없이 들여다봤다는 사실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다. 그의 '감성'은 결국 상대의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 오만함이었구나. '밤새 고민하고 울었다'는 그의 과장된 감성 앞에서, 나는 차라리 소름이 돋았다.


"뭐?! 야, 네가 그 사이코를 알아? 그 아저씨는 우리 부서만이 아니라 전 회사 공식 인증 사이코라고!!!!" 나는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올라 쪽지를 박박 찢어버렸다. 내 손안에서 '감성'이라는 허울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펜션 주인이 조식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바가지가 분명한 3만 원짜리 빵과 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의 분노로 쟁반이 파르르 떨렸다. 이 주변에 감성남이 있다면 당장 달려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 가셨어요." "네?!!! 어딜요?" "체크아웃 먼저 하셨어요. 바쁘신 일이 있다고..."

나는 순간 패닉에 빠졌다. 교통편도 없는 산속 오지에, 나 혼자 두고 떠났다고? 펜션 직원은 "저희 체크아웃 10시예요. 시간 꼭 지켜주시고요"라며 시계를 가리켰다. 그의 무책임한 '감성'이 남긴 현실적인 '시간'의 압박이 숨 막혔다.


나는 챙길 것도 없는 가방을 싸고 펜션 사무실에 앉아 지금껏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했다. 카운터 직원은 "가끔 커플들이 싸우고 가는데, 이렇게 혼자 두고 가시는 경우는..."이라며 말을 흐렸다. 나는 내가 짐짝같이 느껴졌다. 마치 '재판매 불가' 스티커가 붙은 폐기물처럼.

그때 뒤에 있던 펜션 직원이 포터 트럭 뒷좌석에 나를 태우고 읍내로 내려가며 말했다.

"제가 이따가 읍내에 나갈 일이 있어요. 택시가 여기까진 안 들어와요. 제가 나갈 때 거기까지 태워다 드릴게요."

트럭 뒷좌석은 흙삽이며 여러 자재가 뒤엉켜 짐칸에 가까웠다.

나는 내가 짐짝처럼 느껴졌다. '낭만적인 밤'을 꿈꾸다 '재판매 불가' 딱지가 붙은 폐기물이 되어 돌아가는 이 상황이 헛웃음을 짓게 했다.

읍내라고 해봤자, 우리 동네 아파트 상가보다 더 작은 동네였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맞고를 치는 택시 기사님에게 다가갔다.

"서울까지 갈 수 있나요?"

"서울 어디요?" "재미구 나이동이요." "8만 원!"

기사는 나를 흘끗 보더니 영혼 없이 말했다. 좀 요금이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흥정할 힘도 없었다. 벌써 4시가 다 되어갔다. 집에 가면 보고서 마저 쓰고 자야 출근할 수 있다.

그때, 나는 불현듯 전화번호부에서 '가성비남'이 눈에 들어왔다.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저 좀 데리러 와주실래요?"

"네? 거길 왜 제가요?"

"택시도 없고, 정말 곤란해서요. 은혜는 꼭 갚을게요."

"택시 타고 오세요. 거기까지 가는 건 가성비가 안 맞습니다."

…그놈의 가성비. 나는 결국 기사에게 소리쳤다.

"아저씨, 그냥 가주세요!"

덜컹거리는 차 안, 휴대폰이 울렸다. 가성비남이었다.

"8만 원, 비싸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멘탈 회복비라고 생각하세요.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오세요."

건조한 말투였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분노와 황당함 사이에서, 불현듯 씁쓸한 웃음이 터졌다. 사랑은 사라졌지만, 오늘 하루는 '멘탈 회복비 8만 원짜리'로 정리하는 수밖에.


사랑이라는 감성을 내세워 나를 유혹했던 '감성남'과, 냉정한 계산으로 나를 밀어냈던 '가성비남'. 나는 그 둘 사이에서 8만 원이라는 '멘탈 회복비'를 치렀다. 이 돈은 단순한 택시비가 아니었다. 허울과 계산이 없는 진짜 사랑을 찾기 위해 지불한, 씁쓸하지만 값진 수업료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그 수업료를 내고도 다시 웃을 수 있는 용기 속에서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The price of anything is the amount of life you exchange for it."
"어떤 것의 가격은 그것을 위해 당신이 교환한 삶의 양이다"
- Henry David Thoreau


20250825_1608_한국 음식 조합_remix_01k3g0rv7we8vadz0z38057582.png


저작권고지1.jpg


월, 수, 금, 토 연재
이전 16화사랑,조건부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