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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Sep 15. 2023

삶의 끝에서야 나에게 던졌던 질문

지금, 행복한가요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본모습을 포기하고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나를 버리고 있지는 않나요?"


이 세상에 태어나며 우린,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기준, 그 안에 경쟁이라는 자연스러운 환경에 놓인다. 그 환경에서 자라며 남들이 정해 놓은 시선과 이치에 맞추며 사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남보다 좋은 성적, 남보다 좋은 학교, 남보다 좋은 직업, 남보다 잘난 배우자, 남보다 좋은 집 그리고 남의 자식보다 더 잘하는 자식 등등. 나도 그렇게 누가 정했는지 모르는 기준에 떠밀려 내 삶을 살아내면서, 누구나 살면서 당연하게 추구하는 모습, 그것이 성공일 것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성공'이라고 하면 대부분 거창한 주제를 떠올린다. 내가 생각했던 성공이란 돈이 많은 사람, 명예를 가진 사람, 좋은 대학을 나오고, 하고 싶은 것을 전공해서 그 일들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며 소통하다 보니 누군가 보기에는 성공을 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늘 끊임없이 외로움과 공허함에 시달리는 것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 또한 무언가를 덜 한 것 같고,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것 같은 생각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와 다른 사람, 나보다 더 성공한 사람, 나보다 더 가진 사람과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며 더 갖기를 희망하는 습관은 나만 가지고 있는 버릇은 아닌 것 같이 느껴져서 그땐 조금 안도했던 것도 같다.


세상의 시선에 기준하여 '충실히 살아내기'에 버텨온 나의 삶은 남과 비교하고 조금 더 인정받기 위해 나를 희생시키는 모습이었다. 내 안에서는 '이건 아니야'라고 외쳤지만, '그래도 이렇게 노력하고 살면 조금 더 남보다 나은 삶을 살겠지'라고 생각하며 힘들다고 말하는 내 마음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애쓰고 버텨냈다. 남과 비교하고 남보다 잘하기 위해 살아온 습관은 부모에게 하는 효도와 자식에게 주는 사랑까지 '남보다 잘해야 하는 도구'로 전락시켜 버렸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엄마로 너무나 애쓰고 살아왔기에 그에 합당한 결과와 인정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난 좌절하고 원망하고 분노했다. 그러한 비교와 열등감의 감정은 내 영혼을 메마르고 피폐하게 했다. 결국, 원망하고 분노하다 자기 비하의 감정으로 몸과 마음이 더는 버티기 힘든 순간에 와서야 비로소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 넌 누구지?'


욕심과 번뇌로 가득 찬 내 마음이 이내 나를 쉬지 못하게 했었음을 왜 난 인지하지 못하고 살고 있었을까?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난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나에게 했다. 이 질문은 내게 알 수 없는 혼란을 주었다. 내가 정말 나답게 살아왔는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자 과거로의 회상으로 마음이 괴로워졌다. 친구들에게 지기 싫어서 열심히 했던 공부, 성적에 맞추어 선택하던 학교, 늘 시끄럽고 복잡한 가정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이른 결혼, 그리고 이어진 준비되지 않은 육아와 살아내기. 그 과정에서 정말 나를 위해 했던 선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정말 나 자신을 위해서 선택한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제야 나를 위한 선택은 스스로 하나 하지 않은 채, 삶이 변하지 않는다고 세상 탓을 하는 나를 보았다. 온갖 결핍감에 찌들어 남 탓을 하며 나는 나를 죽이고 있었다. 결국, 내 모습은 세상과 타협하는 쪽을 선택하는 내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서 왜 내 삶은 변하지 않느냐고 나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한 번도 나에게 진심으로 집중해 본 적이 없었던 내가 나를 보아주어야겠다 그제야 느끼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내 삶을 글로 쓰며 나에게 집중하기 시작하자, 작은 변화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글로 쓰고 바라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애쓰고 살아왔던 내 모습이 가지고 있던 실수하고, 바보 같고, 어리석은... 그래서 실패했던 나와 마주해야 했고, 그런 나도 내가 인정해 주고 보듬어 주어야 했다. 내가 외면하고 싶은 내 모습을 내가 보아준다는 건 생각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다. 어떤날은 글 하나를 써놓고 밤새 울다 지쳐 잠든 날도 있었다. 글로 써놓고 내 삶을 내가 들여다 본다는 건 사실 울다 지쳐잠드는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과정에서 하늘을 올려 보기도 하고, 바람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길가에 핀 꽃 한 송이도 예쁘게 보아주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그 시간이 지나자 언제부턴가 누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내가 살아낸 삶 자체가 감사함임이 느껴졌다.



괜찮다고, 그땐 몰랐으니 그게 최선이었다고 나를 바라보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해 주는 작은 행위가 부인하고 싶던 내 인생을 인정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지나왔던 내 삶의 경험 덕분에 지금은 이렇게 '참된 나'를 얻어가는 과정 속에 있는 거라고. 만약 그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난, 세상이 정한 성공의 법칙을 따라가며 남보다 더 나아야 할 나를 비교하며 내 영혼을 아직도 말살시키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내 삶은 아주 치밀하게 나의 경험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로 인해 난, 어떻게 하면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성공으로 통하는 길은 열릴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졌던 아픔의 시간은 다른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최고의 공부였고, 생각보다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잉여 같은 삶이 인생이 아닐까 스스로 비하했지만 그건 내가 만든 망상일 뿐이었다. 나로 살아 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내 인생이 잉여 같다고 결단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글을 쓰면서 내가 고민했던 아픔의 시간이 누군가에겐 힘이 되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파보았기에 줄 수 있는 신뢰와 사랑은 결국 내가 나를 인정하고, 나를 사랑함으로 생길 수 있는 감정이었다. 내가 미워했던 많은 사람은 내가 용서하지 못한 또 다른 나의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나를 용서하고,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소중한 행위임을 아는 것. 그게 진정 나다움을 찾을 수 있는 방법임을. 그로 인해 내가 진정 행복해지는 방법을 아는 것이 나만의 성공으로 가는 하나의 관문임을 이젠 알 것 같다.


모두에게 성공이라는 기준은 같은 수 없다. 다만 성공의 기준이란 것이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기준이 아닌 내가 행복함에 중심이 맞춰져야 한다는 것.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나에게 맞는 성공과 행복의 기준을 찾은 것 같다.

아로마테라피스트로서 향기를 다루다 보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의해 식물 향유의 값어치가 정해진 것을 알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강수량, 기후, 토질, 일조량 등에 따라 식물이 재배되는 환경이 달라지고 재배되는 지역과 방법에 따라서도 그 자체의 희귀함이 정해지기도 하니 향을 채취하기 어렵고 까다로울수록 값이 올라가고 귀해진다. 그러나 식물들은 그러한 기준과 자신들의 삶을 동일시시키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어디에서 어떻게 자라든 그들은 주어진 환경 내에서 싹을 틔워야 할 때와 꽃을 피워야 할 때를 기억하고 해낸다. 어느 식물이 어렵게 피어나 더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해서 자기 자신의 꽃을 피우기도 전에 떨군다던가 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조용히 가만히 자신의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내 피워낸다.


자신의 향을 사람들이 좋아해 주든 좋아해 주지 않든, 자신이 만들어낸 치유 물질은 지극히 그 식물이 살아낸 자신의 삶의 기준이다. 식물을 보면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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