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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올라프 Sep 13. 2021

하늘에 계신 친할아버지께 띄우는 편지

많이 그리워요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예요.

할아버지를 불러보는 게 26년 만이에요.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계신가요?


할아버지께서 하늘나라 가신 게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으니 벌써 햇수로 26년이 흘렀네요. 제가 할아버지와 같이 살던 당시 아빠의 나이가 됐어요. 재작년엔 결혼도 하고요. 한 해가 가면 갈수록 시간이 더 빠르게 지나가는 듯해요.


할아버지께서는 그 많은 손주들 중 유독 저를 예뻐하셨다고 들었어요. 딸 다섯에 아들 둘이 낳은 손주들이 족히 10명은 넘었을 텐데 막내아들인 아빠의 장녀인 저만 안아주고 애지중지하셨다고 해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아빠는 가끔 술에 취해서 들어오실 때마다 저를 앉혀놓고 할아버지 얘기를 하시곤 했어요. 할아버지께서 장남(저에겐 큰아버지죠)을 편애하시는 바람에 차남이던 아빠는 할아버지를 정말 많이 미워했었다고 해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그 많은 손주들 중 저를 유독 사랑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아빠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고 했어요.


장남만 편애해오던 할아버지가 장손도 아니고, 손자도 아닌 손녀인 저를 끔찍이 아끼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아빠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정확한 아빠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지 않았나 싶어요. 딸만 둘인 아빠에겐 제가 장녀였고 장녀(장남)에게 부모가 가지는 기대를 부모가 되고 난 후 아빠도 이해하게 됐을 테니 말이에요.


할아버지의 사랑 덕분인진 몰라도 할아버지 손주들 중 제가 제일 공부를 잘했고 집안에서 처음으로 서울대 졸업장을 가진 사람이 되었어요.


할아버지, 세상을 살면 살수록 삶이 정말 만만치 않다는 걸 느껴요. 할아버지께선 한국이 가난하고 전쟁을 치르던 때를 살아오셨지만, 저희 세대는 오래도록 통용되어 오던 법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어요. 근로소득만으론 부자가 되기는커녕 중산층 삶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시대이고 내 집 하나 장만하는 일도 어려워졌어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삶이 너무 팍팍하게 느껴지네요.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고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가끔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압박감을 느껴요. 이제 부모님께도 걱정거리와 고민을 솔직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이 들어 버렸어요.

부모님께 괜한 걱정 끼쳐드릴까 봐, 또 자식에게 더 많은 걸 해주고 싶은데 그럴 상황이 안 되는 부모님의 마음을 행여나 아프게 할까 봐 두려운가 봐요.


요새 부쩍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는 이유는, 아마 제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소연하고 위로받을 어른이 절실해서인 듯싶어요. 할아버지와 같이 살던 7살 때 모습 그대로 어리광도 부리고, 제 생각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수 있는 든든한 제 편 말이에요.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셨으면 제가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을 것 같아요.


할아버지께서 지금의 저를 보면 어떤 말씀을 해주실까요? 다 큰 어른이 된 저를 보고 흐뭇해하실까요? 제가 머리로는 알지만 아직 마음으로 깨닫지 못한 인생의 지혜를 말씀해 주실까요?

왜 저를 그렇게 유독 예뻐하셨는지, 막내아들인 아빠에 대한 할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이었는지. 할아버지와 소주   기울이면서  깊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요.


할아버지, 편지를 쓰다 보니 꼭 할아버지께서 제 곁에서 저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시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할아버지께 편지할게요.


나중에 만나 뵐 때까지 하늘나라에서 저 잘 지켜봐 주세요. 많이 보고 싶어요.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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