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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sil Blossom Jul 18. 2020

발자국이 보내온 편지 한 통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우리 집으로 부쳐오는 수많은 우편물 가운데 수신자란에 내 이름 석자가 적힌 녀석을 만나는 건 고작 1년에 한두 번 꼴이기에 우편물은 확인하지 않는 편이 더 자연스러웠다. 편지, 엄마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질적인 단어의 주인이 정말 내가 맞는 건지 의심부터 들었다. 막상 건네받은 두 손에 들린 수줍은 봉투는 낯설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마음이 들었다. 잘 찾아와 주어 반갑고, 기특하다.


편지를 보내온 사람은 다름 아닌 1년 하고도 6개월 전, 상해 유학 시절의 나였다. 과연 한국까지 무사히 보내지긴 할지, 혹여 중간에 누락되진 않을지, 이사를 가게 되면  오글거리는 편지를 다른 이가 대신 받게 되는  아닐지, 별별 의심을 하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속는  치고 부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2019년 생일을 맞이할 스스로를 생각하며 보냈던 축하 편지는 아쉽게도 조금 지각하여 당일로부터 몇 주가 흐른 후 도착하였지만 시간을 헤매다 결국은 주인의 곁으로 돌아왔다. 상해 황푸강의 전경이 조각된 빨간 편지 속에는 2018년 2월 2일,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바람과 응원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중국스러운 빨간색이 매력적인 편지지


모든 것이 그러하듯 끝이 정해져 있기에 더욱 아쉽고 소중하다. 나의 유학 생활도 꼭 그러했다. 그 해, 절친했던 동기 몇 명은 학업을 마치고 한 학기 먼저 귀국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친구들과 헤어질 순간을 손꼽는 건 참 힘든 일이었다. 햇수로 3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상해에 갓 도착한 21살의 기억을 머금은 채, 서 있는 그곳이 타국 땅이란 사실을 자각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삶은 의도한 바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쯤 깨달았던 것 같다. 공기 중의 물기가 차갑게 두 뺨을 스치는, 아직은 조금 쌀쌀했을 2월의 신천지(新天地, 상해의 번화가)를 거닐면서.


졸업이 다가올수록 중국에 남겠다고 더 열심히 떠들고 다녔던 건, 결코 쉽게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나의 굳은 의지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동기들 중 제일 일찍 귀국길에 오른 당사자가 되었다. 덕분에 여기저기서 뒤통수 맞았다는 울분 섞인 목소리를 들었었다. 편지에는 졸업 요건인 HSK 6급 취득과 논문 완성 그리고 취업 준비를 순조롭게 마쳤을 것이라는 발신자의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실제 앞서 언급한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 현재 나는 당시 꿈꾸던 20대의 자수성가한 신여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아무래도 30대로 미뤄야 할 것 같아 보이지만 말이다.)


나로부터 생일 축하를 받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보통, 눈 앞에 닥친 문제들과 상황에 맞서느라 나 자신을 돌보거나 응원하는 것이 어렵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을 까맣게 모르고 있을 과거의 나는 조금 더 여유 있는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과거는 미래를 기준으로 바로 오늘임에 틀림없다. TV나 잡지 등 매체들에서 인터뷰이(Interviewee)들에게 하는 단골 질문 중 하나가 '10년 후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아니던가. 찾아보니 한국에도 이와 비슷하게 1년 후에 편지를 배달해주는 '느린 우체통' 서비스가 있었다. 먼저 경험해본 자로서 이야기하자면, 잊고 지내다 받는 순간 기분이 좋아질뿐더러 힘들 때마다 꺼내 보면서 용기를 얻을 수도 있었다. 혹시 우연히 느린 우체통을 만나게 된다면, 예쁜 편지지에 온전히 나를 위한 메시지를 채워 1년 후 성장해 있을 나에게 보내시길 추천드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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