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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Jun 22. 2023

나의 불교 연대기

불자가 된다는 것


 앞으로는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를 외치며 뒤로는 보통 사람의 스케일을 넘어선 비자금을 꼬불치던 이가 대통령이었던 그때 그 시절,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갱상도 부산에서 태어난 내가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국민학교 앞 문방구와 동네 점방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던 그 시절,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엄마는 나를 데리고 절에 갔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으며 엄마는 왜 절에 갔을까? 그때보다 머리가 커진 지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를 모르겠다.

 

 나의 엄마 윤 여사는 가피 따윈 믿지 않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애티튜드를 지닌 분이다. 윤 여사는 결코 쉽지 않은 여성으로서 한 가지 일화를 밝히자면, '안녕하세요, 보험공단입니다. 세금 환급받으시라고 연락드렸습니다' 라며 전화 한 보이스피싱 일당에게 '아, 그래요? 그럼 내가 직접 가서 환급받을게요" 하면서 그들에게 더 이상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 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나게 보험공단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사기를 못 당한 적이 있다(훗날 알게 되었는데 비브라늄보다 센 강심장의 윤 여사를 매혹시킨 건 믿음, 소망, 사랑이 아닌 주이었다. 윤 여사에게 주식이란 종교보다 만족은 더 크고 불확실성은 더 적은 꿈과 희망의 동아줄이었다. 후기를 밝히자면 개미of개미인 윤 여사는 주식으로 돈을 잃거나 본전 치기만 했는데 아직도 하신다). 


 리처드 도킨슨과 함께 종교의 대척점에 서 있는 엄마와 불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딸은 부처님오신날이되면 절로 향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섞여 산으로 행했다. 엄마가 다니던 절은 동네 산 중턱에 있어서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올라가야 했다. 마을버스가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늘 걸어서 올라갔었다(엄마 버스비 아낀다고 당연하게 걸어갔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늙고 병든 엄마는 이제 그 길을 걷지 못하지만 당시 30~40대였던 젊은 엄마는 힘차게 올라갔다. 중력을 거스르며 위로 위로 향하다 부처님이 나를 괴롭히려고 이 땅에 오신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즈음 쨔잔하고 절이 나타났다.


 절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리 오래되지도 크지도 않은 평범한 절이다(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사세확장에 성공하여 엄청 커졌다). 절 이름은 흔하고 흔한 '관음사'.  부처님오신날 우리의 일정은 매년 같았다. 휴일인데 늦잠도 못 자고 평소처럼 일어나서 힘들게 절에 올라가 인파를 헤치고 한참을 기다려서 아기 부처님 목욕시키고, 보시함에 천 원 넣고, 비빔밥을 먹으면 끝. 벌건 대낮에 말짱한 정신으로 다시 집으로 고고씽.

 

 국민학생에게 부처님오신날은 힘들고, 사람 구경하는 날에 불과했다. 아, 억센 갱상도 아지매들이 법복이지만 나름 단정히 차려입고 보기 드물게 엄전히 행동하는 걸 보는 날이기도 했다(하지만 뭐에 화가 났는지 '보소! 아지매!'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곤 했다). 아, 비빔밥 먹는 날이기도 했고. 의미 같은 건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엄마가 불자가 아님을 눈치채고 있었다.


 엄마는 간혹 동지나 초파일에 나를 데리고 절에 가곤 했다. 일부러 그랬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스님의 법문이 절정을 향해 갈 즈음에(스님의 표정과 어조에 변화가 없기 때문에 기승전결을 포착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루했다는 이다) 절에 들어서곤 했기에 우리는 대개 대웅전 앞마당에 잠시 서 있다가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면 그제야 들어가 삼배하고 보시함에 천 원 넣고(보시 천 원은 국롤 아니, 맘룰이어서 경제지표나 물가상승률은 가볍게 무시하고 이십 년 이상 지속되었다) 공양간에서 밥을 먹고 집으로 오곤 했다. 루틴은 석가탄신일과 같았지만 메뉴가 달랐다. 동지에는 팥죽이 나왔고, 초파일에는 대개 비빔밥이었으나 다른 밥이 나오기도 했다. 절에 간다는 건 곧 밥을 먹는다는 뜻이었다. 단지 밥 하기 싫어서 엄마가 그 먼 길을 나를 데리고 갔을 리는 없었을 텐데 나 역시 엄마가 된 지금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아예 0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 때우고, 오며 가며 구경하고, 밥 먹고. 내가 공휴일이나 주말에 아이 데리고 살 것도 없는데 굳이 마트나 백화점에 가는 이유가 바로 이게 아닌가. 윤 여사의 진짜 의도는 하느님도 모르실 듯.

  

 밥 먹으러 일 년에 한두 번 가던 절은 고등학생 시절, 사교의 장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처음 사귄 친구는 내 뒷 번호였던 아이였다. 입학한 지 일주일도 안되어 반 아이들과 아직 서먹서먹했었던 시기였는데 같이 운동장 청소를 하던 뒷번호의 그 아이는 주말에 뭐 하냐며 약속 없으면 좋은 데 가자며 내 귀에 캔디를 속삭였다.  일요일  아침  친구를 따라 나선 나는 알게 되었다. 고것이 내 귀에  캔디가 아닌 염불을 속삭였음을. 도착한 곳은  엄마가 나를 데리고 가던 '관음사'였다. 나름 재미있었나 보다. 2년간 주말이 되면 꼬박꼬박 절 불교학생회에 나갔다(고3은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지 않는 전통이 있어 실질적으로 활동은 2년만 하였다. 부처님도 수능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 하는 게 대한민국의 국롤). 학원도 안 다녔고, 학교 말고는 딱히 갈 곳이 없던 내게 절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사회화&엔터테인먼트의 무대였다.


 절에 드나들며 책과 티브이에서만 보았던 스님들 직관하게 되었고, 간사 선생님은 청소년의 마음을 후리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었으며, 선배와 후배라는 네트워크는 난생 처음 남자라는 생물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아무 일 없었다는 게 젠장스럽지만). 동갑내기 친구는 나 포함 5명이었다. 4명이 여자, 1명은 남자였다.


 절 학생회이니 당연히 예불을 했는데 그때마다 <천수경>은 왜 이렇게 기냐는 생각을 하며 입으로 경을 외던 기억이 생생하다(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요즘은 한글 경전이 널리 보급되어 있지만 9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 한문이었는데 우리 관음사는 어찌하여 일찍이 한글 천수경을 도입하였는지 예불 시간이 다른 절 보다 길었다. 가끔 선배들이 약식으로 한다며 중간 내용을 대폭 줄일 때가 있었다(왜 약식으로 하는지는 설명을 안 해주더라.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그런 날은 예불이 일찍 끝났는데 '약식'이라는 두 글자만 들으면 없던 신심도 솟아날 정도로 '약식'은 미성년 불자들을 흥분시켰다. 예불은 우리들끼리 했다. 목탁도 고2 선배가 쳤다. 이런 분위기여서 선배들 멋대로 약식 천수경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지금 생각하면 단체로 미쳤구나 싶다. 예불을 줄인다고! 주지스님께서 아셨다면 이 마구니들을 관심법으로 맴매하셨을 텐데... 당연히 이때 이후로 약식 천수경 따위 본 적이 없다. 고딩의 패기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예불이 끝나면 학생회 담당 스님이 오셔서 짧은 법문을 해주시거나 명상을 하게끔 해주셨는데 법문은 뭐, 기억나는 게 없다. 공식적인 학생회 활동이 끝나고 절 밖으로 나온 고딩 불자들은 참으로 건전하게 싸돌아 다니며 주말을 보냈다. 몰려다니며 웃고 떠들고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오븐 스파게티를 사 먹던 기억만 남아있다. 절 친구들과는 꽤 오랫동안 지지고 볶으며 우정을 나누었고 2명은 지금도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수능이 끝나고 주지스님 및 부주지스님께 인사드리러 갔는데 스님 방에 들어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개인방이라기보다 신도들이나 손님을 만나는 접객실이 아니었나 싶은데 살면서 그렇데 단출하고 단아한 방을 본 적이 없었다. 이후 종무원으로 일하면서는 숱하게 보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충격적으로 살풍경한 방이어서 기억이 생생하다. 부주지스님은 훗날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인연이 있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절로 이끌었던 엄마와 아직까지 만나는 2명의 절 친구들은 현재 성당에 다닌다. 가톨릭 신자라는 말이다. 이 중 엄마의 개종이 가장 웃기면서 수긍이 갔는데 부처님은 아무리 기도를 해도 안 들어줘서(당시 우리 엄마의 가장 큰 소원은 나의 결혼이었다) 실망하던 찰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절친 및 친정&시댁 식구들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더니 그때부터 소원의 잭팟이 터졌다고. 나도 결혼하고, 동생도 결혼하고, 동생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나는 아이를 낳아서 우리 엄마는 드디어 소원 4콤보 성취를 달성하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에게 패한 부처님은 불교 서적, 다포(찻상에 까는 수건 같이 생긴 천) 등등과 함께 친정집에서 퇴출되었다. 몇 년 전 엄마한테 은근슬쩍 물어보니 신은 안 믿는다 카던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셨는지 모르겠다. 참고로 나와 동생의 종교는 불교다. 동생은 나이롱 신자이긴 하지만. 현실세계에서도 사이좋은 불교와 가톨릭답게 친정집에 온 식구가 다 모여도 종교 분쟁은 없다. 엄마는 딱히 내켜하지 않지만 년 사위가 일하는 절에 연등을 달아 절 살림을 풍족하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음주가무로 바쁜 20대를 보내느라 불교는 뒷전이었다. 취준생과 계약직을 오고 가던 20대 중반, 조계사 '신도기본교육'에 등록했다. 주변에서는 그걸 왜 듣냐고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불교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고나 할까. 취미가 '배우기'인 나는 이것저것 얕고 넓게 배우길 즐겨했는데 불교에 대한 흥미도 딱 그 정도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종교를 갖고 싶다거나, 불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종교를 믿기에는 엄마의 영향으로 나 역시 너무 세속적이었다. 조계사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아는 절이 조계사 밖에 없으니 선택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몇 달간 조계사에 다니며 불교의 기초를 배웠고 끝난 뒤 다시 음주가무를 즐기는 취준생으로 회귀했다. 조계사 신도 등록을 하라는데 돈을 내야 해서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정기적으로 절에 갈 일은 없었다. 수계증은 자취방 어디 간에 처박혀 있었다. 그래도 버리진 않았다.


 그랬던 내가 수계증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 일이 생겼다. 여러 직장을 오가며 푼돈을 벌어 살던 20대 비정규직은 30대 백수가 되었고 똥줄 타는 마음으로 구직사이트를 보던 중 모 사찰의 종무원(사찰에서 일하는 일반인 직원)을 뽑는 공고를 보았다. 지원 자격 중 하나가 '기본교육 이수'였다. 수계증을 이렇게 써먹다니! 서류와 면접을 거쳐 합격. 두둥. 나중에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자니 1순위로 뽑혔던 사람이 연봉문제로 거절해서 2순위였던 내가 하게 되었다고. 그때 나는 돈이 급해 연봉 같은 건 안중에 없었다. 그렇다고 급여가 아주 짠 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막걸리에 밑반찬을 안주 삼아 먹던 본인은 미국산 소고기에 맥주를 곁들이게 되었다. 월급을 술에 탕진했다는 말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종무원으로 일하면서 다시 불교와 찐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생에 가장 긴 직장생활을 했다(만 2년도 못 채웠지만). 이때 비로소 내 종교가 불교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정확하게는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불교가 스며들었다. 매일 법당을 들락거리며 불보살님을 뵙고, 신도들과 부대끼고, 스님&종무원들과 고민을 나눴다. 그 시간들이 쌓여가다 보니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던 불교용어도 익숙해졌고, 불교교리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책도 이것저것 많이 찾아 읽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후회가 많다.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30대의 나는 철이 덜든 어른이어서 부유하며 성내고 싸우면서 았다(술도 엄청 처마셨지). 퇴사할 무렵에는 이구역 비공식 쌍년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싸움꾼이 되어있었다. 왜 그랬을까. 모르겠다. 그땐 미쳐있었다. 내가 좋은 종무원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때 같은 종무원이자 사수였던 남자가 남친이 되고 남편이 되었다(하... 비속어는 생략한다. 결혼은 비추라는 개인적인 의견만 밝히는 바이다).


 결혼을 앞두고 관음사 부주지스님 모 절에서 다시 만났다. 남편(당시에는 남친)은 더 큰 절로 스카우트되어서 옮겨갔는데 그 절의 주지 스님이 바로 () 관음사 부주지스님이셨다. (현) 큰 절 주지스님이 된 (구) 관음사 부주지스님은 당연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10여 년 전에 한 번 본 여고생을 어찌 기억할까. 몇 년 후 스님은 다른 절로 옮기셨고, 이제는 가톨릭교도가 된 친구(절에 가자고 꼬드긴 그 친구)에게서 내 번호를 받아서 전화를 하셨다. 당신 절에 종무원으로 일 할 수 있겠냐고. 아이가 어려서 힘들다고 거절하자 스님께서는 알겠다며 앞으로도 연락을 주고받자고 하셨는데 그 뒤로 감감무소식이다. 스님, 잘 계시죠? 근황은 불교신문에서 찾아볼게요~ 



간략한(?) 나의 불교 일대기는 대충 이렇다. 종무원 때의 일화나 그 외 잡다한 에피소드들은 많이 빠졌다. 앞으로 종종 써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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