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에도 무게가 있다면 어떤 단어가 가장 무거울까. 필자에게는 ‘자비’라는 두 글자가 한없이 무겁다. ‘자비’하면 왠지 고단함과 불편함이 느껴져 선뜻 다가가기도, 쉽사리 입에 올리기도 어렵게 느껴진다. 도대체 자비가 무엇이길래 이리도 아득할까. 불교의 자비는 무엇이 다를까. 자비를 생각할수록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자비慈悲의 뜻은 이렇다. 자慈는 ‘친구’, ‘가까운 자’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리Maitrī와 팔리어 메타Mettā를 번역한 말이고, 비悲는 ‘공감’, ‘연민‘이란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 카루나Karuṇā를 번역한 말이다. 자란 친구를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하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비는 연민을 느껴 타인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이다. 즉,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이 자비다.
세상에는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큰 말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비가 아닐까 한다. 타인의 즐거움은 질투(저 사람이 아닌 내가 됐어야 하는데)와 자기 비하(난 왜 저렇게 못하나)로 이어지기 쉽고, 타인의 괴로움은 안도(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와 비난(내 저럴 줄 알았다)으로 이어지기 쉽다. 내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순수하게 함께 기뻐하고 괴로워하기란 굉장히 어렵다. 왜냐하면 감정의 중심이 ’나‘이기 때문이다. 세속적 자비는 중심이 ’나‘여서 앞의 예처럼 이기적으로 흐를 수 있지만 불교적 자비는 중심이 '중생'이기에 이타적으로 흐른다. 때문에 불교의 자비는 요연하게 느껴진다.
자비가 너무 어렵다는 이에게 영화 <길(La Strada)>을 권한다. <길>은 1954년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흑백영화다. 필자는 천둥벌거숭이였던 20대 초반에 이 영화를 처음 보았다. 처음에는 심드렁했지만 이내 빠져들어서 보았다. 살면서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는 손에 꼽는데 <길>은 그중 한편이다.
잠파노는 가슴으로 쇠사슬을 끊는 묘기를 보여주는 차력사이다. 그는 수레 달린 오토바이를 타고서 사람 많은 곳을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한다. 같이 유랑하며 조수 역할을 하던 로사가 죽자 잠파노는 로사의 엄마를 찾아간다. 먹여 살려야 하는 아이들이 줄줄이 딸린 가난한 로사의 엄마는 1만 리라를 받고 로사의 동생 젤소미나를 잠파노에게 판다. 공부도 시켜주고 일도 가르쳐주겠다는 처음의 말과 달리 젤소미나는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받으며 잠파노의 돈벌이에 이용된다.
영화에서는 젤소미나가 ‘약간 모자라다’고 표현되며, 어떤 영화 리뷰에서는 백치로 설명하기도 한다. 필자는 의사가 아니기에 정확히 어떤 상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젤소미나는 행동이 굼뜨고, 재빨리 상황 파악을 하지는 못하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안다. 또한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나쁜 행동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느끼며, 신앙심이 깊다.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은 젤소미나와 달리 잠파노는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천하의 나쁜 놈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잠파노를 가리켜 짐승이라고 하는데 이 말대로 잠파노는 동물적 본능이 강하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대개 분노, 질투, 탐욕 같은 것이고, 타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여자는 쾌락을 위한 도구고, 서커스단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도구다. 잠파노가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군다면 뭔가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하룻밤 신세를 졌던 수녀원에서는 은 장식품을 훔치려고 하고,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나자 다시는 감옥에 갈 수 없다며 시체와 차를 유기한다. 양심과는 거리가 먼 잠파노는 천하의 잘난 사람은 자신이고, 잘못은 모두 다른 사람 때문이라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젤소미나는 이런 참파노가 싫다. 도망치기도 했지만 다시 붙잡혀 맞기만 했다. 잠파노가 경찰서에 갇히는 바람에 혼자 있게 된 젤소미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마토라는 곡예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자신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며, 아무에게도 쓸모가 없다며 우는 젤소미나에게 마토는 말한다.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어딘가 쓸모가 있어. 너도 마찬가지야, 비록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더라도 말이야” 젤소미나는 이 말에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짓는다. “난 잠파노와 같이 가기 싫어요. 하지만 내가 같이 있지 않으면 누가 있겠어요.” 결국 젤소미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잠파노의 곁에 남는다. 하지만 나중에 젤소미나가 미쳐버리자 잠파노는 매정하게 그녀를 버리고 도망친다. 자신이 일으킨 사건 때문에 젤소미나가 정신을 놓았는데도 정상이 아닌 그녀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혹여나 자신의 범죄가 드러날까 두려웠던 잠파노는 가장 잠파노 다운 선택을 한다.
몇 년이 지나 공연차 들른 어느 마을에서 우연히 젤소미나의 비참한 최후를 듣게 된 잠파노. 그날 저녁 만취해 행패를 부리던 잠파노는 “혼자 있고 싶어. 난 아무도 필요 없단 말야.”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혼자 있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무도 그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곁을 내 준 사람을 버리고 나자 이제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시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주성치 주연의 영화 <선리기연(1995)>에 이런 대사가 있다. “그녀는 제 마음속에 눈물 한 방울을 남겨 두었어요.” 젤소미나는 냉혈한 잠파노의 가슴에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남겨놓았다. 그 눈물이 커지고 커져 넘쳐흐르게 되었을까. 비틀거리며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간 잠파노는 쓰러져 오열한다.
자비에 자격은 없다. 주변에 민폐만 끼치는 잠파노 같은 사람도 자비를 받을 수 있고,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젤소미나 같은 사람도 자비를 베풀 수 있다. 자비 앞에서 모든 생명체는 평등하다. 세상의 후미진 곳에서 자비는 더욱 빛을 발하는데 자비 한 방울은 고통 속을 헤매는 이들의 마음을 감로처럼 적신다. 자비를 꼭 물질로 베풀어야 하는 건 아니다. 젤소미나처럼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발휘한다. 마음만 내면 된다는 점에서 자비는 한없이 쉽지만, 분별을 버려야 한다는 점에서 자비는 한없이 어렵다. 베푼다는 생각이 조금이나마 있다면 자비가 아니라 자만이 되기 때문이다.
자비의 중심이 중생이라는 것은 범천권청梵天勸請과 전도선언傳道宣言을 통해 알 수 있다. 보리수 아래서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께서는 49일간 법의 즐거움을 누리셨다. 마지막 날 선정에 든 부처님께서는 탐진치貪瞋痴에 물든 중생들이 법을 이해하지 못하리란 생각에 법을 설하지 않기로 하셨다.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챈 제석천과 범천은 간절히 요청하였다. “여래시여, 이 세상에는 그래도 선과 진리 앞에 진실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버리지 마소서. 그들마저 기회를 놓치는 건 참으로 슬프고 애석한 일입니다.” 범천의 계속된 간청에 부처님께서는 중생에 대한 깊은 연민을 이기지 못해 다시 세상을 바라보았다. 다양한 모습의 중생을 본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 이제 감로의 문을 여나니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믿음을 버리고.” 제자가 60여 명이 이르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대들이여 이제 법을 전하러 길을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세상을 불쌍히 여겨 길을 떠나라.” 이렇게 불교는 중생을 향한 자비심에서 퍼져나갔다.
세상에는 자비를 악용하려는 이들도 있다. 이 때문에 자비가 더욱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비란 무조건 참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일까? 자비심을 이용해 나쁜 짓을 벌이려는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할까? 불자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비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 없는 자비는 자기만족에만 그치고, 자비 없는 지혜는 탁상공론에만 머문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내 행동이 상황에 맞는 것인지, 정말 상대방을 위한 것인지 먼저 생각해야 할 때도 있다. 불교가 어려운 이유는 타 종교처럼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교조적인 답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부처님께서는 지혜와 자비에 대한 법을 많이 설하셨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무려 2,600년 전의 가르침이 지금도 유효할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법은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우리는 법을 모범답안 삼아 내가 처한 상황에 다양하게 적용해 보면서 지금, 여기, 나에게 맞는 답을 찾아가야 한다.
답을 찾아가는 그 길이 힘들고 외로울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떠올려보자. 자비하면 관세음보살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부처님께서도 한없는 자비를 베푸셨다. 부처님을 보리수 밑에서 일으킨 것도, 45년간 길에서 길로 다니며 법을 설하게 한 것도 모두 자비심이었다. 자비의 힘은 세상을 바꿀 정도로 강력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이의 가슴을 녹일 정도로 뜨겁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자비 한 방울을 떨어뜨리자. 먼저 고해의 바다를 건너고 있는 기특한 내 자신에게 한 방울, 소중한 내 주위에도 한 방울 떨어뜨리자. 작고 보잘것없는 자비라 해도 자격은 충분하다. 대신 꾸준히 떨어뜨려야 한다. 내일도 한 방울, 그다음 날도 한 방울, 그 방울이 모여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처럼 온 세상에 스며들면 매일이 부처님오신날이다.
사진 출처
1. 위키피디아. 길(1954년 영화)
https://ko.wikipedia.org/wiki/%EA%B8%B8_%281954%EB%85%84_%EC%98%81%ED%99%94%29
2. 법보신문, '보살의 의미와 보살 관념의 출현', 2022년 1월 17일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06376
3. 서울신문, '[포토] 부처님오신날 조계사에서 관불의식' 2023년 5월 27일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3052780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