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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Jan 21. 2024

일일 금주 일지 1

금주 시도 1일째 - 쿠팡 덕분에 성공

2024년 1월 20일.



100일 금주를 시도한다!


살면서 오백 번, 오만 번, 오억 번, 오조 번이나 결심하고 99.9%의 확률로 망했지만

그럼에도 또 시도하는 바이다.


술 때문에 하지 못한 일, 술 때문에 사지 못한 것(평생 술 때문에 쓴 돈을 모았어도 울 시내 국평 아파트는 못 샀을 것이라 이건 딱히 아쉽지 않지만)은 물론이고


술로 찐 살과 매년 높아지는 콜레스테롤 등등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할 논리적인 이유를 한 트럭 들이밀어도


20여 년간 나 자신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요 모양  꼴로 살다가는 LED 100개를 켜 놓은 듯한 아우리가 빛나는 미래 대신


커리어 시작도 하기 전에 폭망, 무병단수, 유병장수, 알콜성 치매 같이


필라멘트가 터지기 전의 백열전구보다 어두운 미래만 있을 거라는 건 명확히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 마이클 부스의 <먹고 기도하고 먹어라>라는 책을 읽다 보니


이제 내 음주 문제와 결판을 낼 때는 허본좌님의 말씀대로 라잇 나우,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알코올 중독이지만 '나는 애주가이지 알코올 중독자는 아니다'고 주장하는 여느 알코올 중독자들과 마찬가지로 흥청망청 마시며 살던  마이클 부스는 이혼이라는  대 위기를 마주하게된다.


 결국 두 가지 옵션을 두고 고민을 하는데


1번은 술을 아예 끊는 것이고 2번은 술을 절제하는 것이었다.


그는 1번 옵션을 저울질하며 생각한다.


차갑고 드라이한 리슬링을 앞으로는 절대 맛보지 못한다는 것,
부드럽고 따듯한, 심장을 태우는 듯한 싱글 몰트도 마찬가지.
시원한 생선회에 따뜻한 사케도,
혀를 천천히 감도는 샤토 마들렌의 복잡 미묘한 소용돌이도 즐기지 못한다.
그래도 과연 살 가치가 있을까?

마이클 부스, <먹고 기도하고 먹어라>, 글항아리



 이 부분을 읽다가 책을 덮었다. 그래, 난 마이클 부스와 달라.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술이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야. 만약 내가 술을 끊는다면 술의 맛이 그리운 게 아니라 술 자체가,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사무치게 그리울 거야. 나는 그냥 습관으로 먹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양치질하고 출근 준비하는 걸 생각해 보자. 이 복잡한 일련의 과정이 의식하지 않아도 물 흐르듯 진행된다. 습관화된 음주도 그렇다. 저절로 술을 사고, 마시는 것이다. 여기에 거창한 이유는 필요 없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마시는 거다. 음주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무의식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생각은 급진전해서 만약 술이 맛있어서 마시는 게 아니라면, 딱히 마셔야 할 이유가 없다면, 끊어도 상관없겠다는 데 미쳤다. 잠깐잠깐! 노노노. 이런 극단적인 결정은 금단 현상만큼 위험하다. 실패할 경우 그 후유증이 대단할 테니. 그간 술을 좀 줄이자는 생각은 했어도 완전 끊어야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은 없다. 술을 끊든 안 끊든, 절제는 필요한 상황이고, 준비운동 삼아 백일 금주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금주 1일째, 역시나 어제 마신 술로 더부룩한 상태로 일어나서 콩나물국으로 해장&아침밥을 먹었다.


홍지은의 <스파이시 인도>를 읽고서,  


이국적인 채소와 향신료에 필을 받고(하지만 인도에 가긴 싫다),


수년간 반복하고 있는 식단 돌려 막기를 반성하며 집에 있는 요리책을 꺼내 일주일치 저녁 식단을 짜고,


생 채소 및 이국적 채소에 대한 열망으로 쿠팡에 생 오크라 1kg를 주문하고 나니


아이쿠, 쿠팡에 로동하러 갈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 나는 12월부터 일용직 로동자(쿠팡 용어로 단기사원)로 틈틈이 일하러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쿠팡 로동 후기는 워낙에 많아서 반복해서 쓰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일하는 공정(물건 포장)의 노동강도는 허브의 상하차처럼 무지막지하지도 않고 '힘들지만 견딜만하고, 여러 번 가니 할 만하다'는 수준이고, 밥도 주고, 목장갑도 주고, 공짜 셔틀버스로 데려오고 데려다 주기에 쿠팡님이 계신 방향으로는 오줌도 삼가야 할 만큼 '쿠팡 프렌들리'한 을의 상황이다. 아직까지는(추후 바뀔수도 있다는 말씀!).  


다만 내가 쿠팡에 처음 일하러 갔던 날 놀라서 가슴속으로 외쳤던 말이 있다.


"아니, 이걸 사람이 한다고?"


내가 처음 핸드폰을 산 건 1999년 겨울이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구입한 건 당시 기준으로도 아주아주 늦은 2014년이었다. 불과 15년 사이에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디지털카메라에 전자사전에 MP3 등등 가방 한구석을 점령한 잡다한 기기들은 핸드폰 하나에 쏙 들어왔고, 은행 업무도, 물건 구입도, 회사 업무도 다 핸드폰으로 가능해졌다. 로봇, A.I.라는 말도 일상용어처럼 익숙해져가고 있는데,


매뉴얼이 정해진 업무를 로봇 대신 사람이 하고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TV에서 한 번쯤을 봤을 영상, 로봇들이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른 공정은 모르겠지만 내가 쿠팡에서 하는 물건 포장 역시


물건 크기와 재질과 소비자의 요구에 맞춰서 박스로 포장할지, 비닐도 포장할지 등이 정해져 있고,


그 물건이 파손되기 쉬운 상품일 경우 보조 포장재의 종류와 양 역시 정해져 있으며,


신선 상품일 경우 안에 들어가는 냉매제의 종류 및 양도 역시나 정해져 있다.


즉, 내 생각에는 완전자동화가 여기만큼 쉽고 필요한 곳이 있을까 였다.


오히려 사람이 하기 때문에 실수가 많이 일어나는데 내가 처음 일하러 간 날은 실수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만약 다음날 돈이 안 들어왔을 때 쿠팡에 따지면 나는 상도덕 따위 말아먹은 막돼먹은 인간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다행히 돈은 들어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매일 가는 게 아니라 드문드문 가다 보니 헷갈리는 경우도 생기고,


6번째 갔을 때였나 그날은 또 유독 실수가 잦아서 "다시는 실수하시면 안 됩니다'하고  


눈 레이저를 발사하는 팀장님께 간곡하고 살벌한 경고까지 먹었다(다행히 그 뒤로 불러줘서 계속 나가고 있긴 하다만.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나름 생각하기로는 자동화가 안 되는 이유로 2가지가 있지 않을까 한다.


1번, 로봇이 아직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물건 포장이라는 이 쉬워 보이는 일도 은근히 변수가 많다.


물건 종류와 상태가 천차만별이다 보니 예외가 발생하고, 그때마다 바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사람은 그때그때 판단하여 약간의 변칙도 가능허지만 로봇은 아직까지 그 정도 '유도리(융통성)'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예를 들어 포장을 할 때 물건들 사이즈에 비해 박스나 비닐이 너무 크거나 작으면 사람은 조정이 가능하다.


쑤셔 넣는 게 가능하면 쑤셔 넣고, 물건 상태가 불안하면 포장을 더 많이 하고,


매뉴얼과 안 맞으면 기어코 다른 방법을 찾아낸다.


혹시나 쿠팡에서 물건을 샀는데 물건은 모기만 한데 박스가 티라노사우루스만 하다면


그건 애초에 매뉴얼이 잘못된 건데 그냥 작업한 경우다.


내가 알기로 대부분의 사원님들은 작은 박스로 '알아서' 바꿔서 작업한다.


그래도 박스가 큰 경우는 종류 없는 박스 중에서 그나마 적당한 골랐기 때문이니 사원님들 잘못이 아니다(내가 일하는 곳의 박스는 겨우 3종류다).



2번. 로봇보다 사람이 더 싸기 때문이다.


1번과도 연관되는 건데 공정에 들어가야 할 로봇의 종류가 너무 많은 데다가,


현재까지는 로봇을 개발, 생산하고 관리하는데 드는 비용이 사람을 쓰는 비용보다 높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완전 자동화를 하려면 아마 공장을 새로 짓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할 것이다(싹 폐기하고 다시 지어야 하니까). 완전 자동화를 한다고 해서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오류가 나거나 로봇이 고장 나면 결국 사람이 해결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사람이 싼 것도 아니다(말이 좀 이상하지만). 사람 모집해야지, 관리해야지, 셔틀버스 운행해야지, 밥 줘야지, 쉴 곳 만들어야지, 컴플레인 해결해야지 등등 간단하게 생각해도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을 쓴다는 건 이익을 중요시하는 회사 입장에서 굳이 바꿀 필요를 못 느낀다는 걸 방증하는 게 아닐까. 한 푼이라도 아낄 수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기업 아니던가.  



어쨌든 이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이 경험이자 주관적인 주장이기에 실제 자동화가 안 되는 이유와는 완전히 동떨어져있을 수 있다. 다 떠나서 나는 쿠팡에 일하러 갈 때마다 묘하다.


A.I. 는 바둑 두고, 체스하고, 그림 그리고, 알고리즘 분석을 하는  '머리'를 쓰고 있는데  사람은 여전히 물건을 나르고 올리고 내리고 하며 '몸'을 쓴다는 게 말이다. 애초에 로봇은 사람 대신 힘든 일, 위험한 일 하라고 만든 거 아니었던가.  


첫날 로동으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나는 도서관에서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라는 책도 빌려보고,


EBS <위대한 수업>의 유발 하라리 편도 보았다.


유발 하라리가 흔히 생각하는 'AI 대체 가능한 일'에 대해 사뭇 다른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지위가 높은 직업들은 대체가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고연봉을 받는 직업들을 생각해 보자. ~사로 끝나는 직업 같은 거 말이다.


유발 하라리는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은 대체가 쉽고, 몸을 쓰는 일이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오히려 대체가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의사가 간호사보다 먼저 대체될 거라고 주장한다. 의사가 하는 진단은 여러 가지 상황과 지식을 종합해서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이고, 간호사가 아이를 달래서 주사를 놓고 사람마다 다르게 생긴 몸에 붕대를 감는 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창의력이란 '패턴을 파악해서 섬세하게 분해해 새롭게 조합'하는 일이라고 분석한다. 즉,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A.I. 가 충분히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안 그래도 요즘 챗 GPT가 글도 쓴다고 하니 A.I. 는 이미 인간의 창의력에 대적하고 있다. 글이라면 대체 불가능한 창의력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휴~ (그런데 고객센터의 A.I. 상담원은 왜 말귀가 어두운지 모르겠다. 한 번도 내가 원한 답을 해준 적이 없어서 매번 '인간' 상담원 연결을 해야 하니 말이다)


유발 하라리의 말에 100%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언젠가 사람이 몸을 써야하는 분야가 다 로봇으로 대체되는 날이 온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 시대를 살아서 맞이할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난 2020년이면 인간이 화성에 식민지 건설하러 떠났을 줄 알았다). 다행히 정신 말짱하고 살아있다면 '왕년에 로동 좀 했던 파파할머니'는 라떼 썰을 풀겠지.


야야. 아그야. 내가 쿠팡 덕에 금주 1일 성공했다 안카나.


로동하느라 술을 못 마셔서 금주 1일차 성공. 참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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