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5km 지만 그래도 마라톤
내 생애 첫 마라톤은 여명국제마라톤.
숙취해소제를 만든 기업에서 주관하는 대회라 알코올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은 술꾼에게는
안성맞춤인 대회이다(기념품으로 숙취해소제를 줬다).
대회 전까지 열심히 연습하겠다는 목표는 미세먼지로 인해 무너졌다.
'나쁨'이면 그래도 대회가 코 앞이니 뛰어보자 했겠지만
'매우 나쁨'이라 깔끔하게 포기.
건강&목숨을 마라톤과 바꿀 순 없다!(하지만 술은 괜찮다는 것이 술꾼의 논리)
그래도 대회 전날에는 폐를 워밍업 시키기 위해 30분가량 뛰었다.
사흘동안 편히 지내던 폐는 들숨과 날숨을 격하게 반복했다.
폐가 좀 펴지는 느낌이었다.
연습을 너무 안 해서 취소할까 말까 하는 사이 택배로 배번호표와 기념품이 왔다.
배번호표를 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마라톤 대회에 나갈 거라 누가 생각했을까.
나 역시 감히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고 40여 년간을 살아왔는데 한순간의 클릭으로
배번호표가 집에 오는 사태가 일어났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나가서 배번호표를 개시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나는 아니지만 이 배번호표는 뛰고 싶을 게야.
옛말에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무 대신 5km 달리기다.
긴장했는지 선잠이 들었다 깼다 하는 바람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결국 5시에 일어나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7시에 집에서 나왔다.
뚝섬유원지역이 가까워질수록 지하철에는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지하철에서 우르르 내리는 이들을 따라 집결지인 뚝섬지구 수변공원으로 향했다.
옷 갈아입기 귀찮아서 아예 운동복을 입고 갔다.
(시어머니가 사주신) 여름용 등산바지에 (필라테스 등록하니까 사은품으로 준) 반팔 요가티를 입고
(쿠팡에서 산) 야상점퍼를 걸치고 갔는데 추워서 달달달 떨었다.
괜히 나와서 감기 걸려서 가는 건 아닌가 살짝 후회하려던 찰나
모인 사람들을 보니 추위가 확 달아났다.
집결장소에는 사람들이 미어터졌다.
오메, 마라톤이 이렇게 인기 있는 운동인지 몰랐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부도 있었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도 있었다.
단체티를 맞춰 입은 동호인들은 자기들끼리의 동맹을 과시하며 몸을 풀고 있었고,
지인들과 같이 온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문가 복장으로 범접 못할 포스를 내뿜는 이들도 있었고,
나처럼 앞뒤양옆위아래 어디를 봐도 초보 티가 팍팍 나는 이들도 많았다.
마라톤 앞에서 남녀노소가 대통합된 현장을 보니 감동스러웠다.
이 모습을 보고 누가 세대갈등, 남녀갈등, 계층갈등을 떠올리겠는가.
'인류를 대동단결 시키는 건 운동'이라는 말도 안 되는 깨달음으로 득도할 뻔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물품보관소에 가서 가방을 맡기고 배번호표를 달았다.
9시에 대회 시작이지만 10분씩 텀을 두고 풀코스부터 하프, 10km, 5km 순으로 출발하기에
나는 9시 반까지 기다려야 했다(담엔 늦게 오리라 다짐하면서).
먼저 출발하는 이들에게 열심히 박수를 쳐주었다.
천천히 달릴 생각에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5km는 기록측정 칩을 주지 않는다.
핸드폰을 물품보관소에 맡긴 바람에 미밴드는 먹통이 되었다. 어쩔 수 없다. 기록측정은 셀프다.
9시 반이 되어 드디어 출발했다.
아주 천천히 뛰었다.
3개월가량 달린 게 헛되지 않았다고 느낀 건 달리는 내내 나름 '페이스조절'을 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로 달려야 하는지 감을 알기에 다른 사람들의 속도에 좌우되지 않았다.
초반부터 걷는 사람들도 있었고, 걷다 뛰기를 반복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힘들면 걷겠다고 생각했지만 달리면서 계획 변경.
절대 걷지 않겠다! 그래서 페이스 조절에 더 신경 썼다.
3개월간 같은 장소에서 달리다 보니 지겨웠는데(그래서 더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니 아드레날린이 뿜뿜 솟아났다.
'처음'과 '소속감'이 이렇게 사람을 들뜨게 하는지 미처 몰랐다.
러너스 하이는 물론이고 그간 운동하면서 희열 같은 건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첫 마라톤 대회에서 싱싱한, 날 것의 아드레날린을 맛보았다.
어렵게 말해서 아드레날린이지만 쉽게 말하자면 흥분 아니던가.
초반에는 정말 온몸이 흥분으로 달아올라서 아이를 업고 풀코스도 뛰겠다는 망상마저 들었다.
반환점이 가까워지자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늘 달리던 곳은 평지였지만 한강변은 내리막과 오르막이 있어서
덜 지루하기도 하지만 더 힘들기도 했다.
벌써 반환점을 돌아 출발점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힘을 쥐어 짜냈다.
반환점을 돌고 나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뛰어서 완주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5km 별거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어느새 속도가 좀 빨라져 있었다.
확실하지 않지만 출발할 때는 시속 7km 정도였던 것 같은데 반환점 이후로는 8km 이상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1km를 앞두었을 때가 좀 힘들었다. 어쩜 그렇게 출발선이 안 보이던지...
출발선이 가까워지자 기록 단축을 위해 사람들이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흔들리지 않고 천천히 뛰었다. 사실 빨리 뛸 힘도 없었다.
무사히 출발선으로 들어왔고 기록용 시계를 보니 10시 8분. 38분 반에 골인했다.
지쳐서 땅위를 구르거나 헥헥 거리지 않았던걸 보니 정말 적당히 뛰었나 보다.
첫 대회 치고는 잘했다 싶다.
완주의 흥분을 만끽할 동지가 없어서 쓸쓸했다.
주변에 서로 껴안고 손뼉 치고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아 외딴섬처럼 홀로 있는 내가 좀 처량하게 느껴졌나 보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은 많지 않아 보였다.
혼자서 영화로 보러 다니고, 식당서 밥도 사 먹고, 여행도 잘 가는 사람이지만
불혹을 넘어서니 나도 이제 멜랑콜리해졌나, 괜히 외로웠다.
이런 외로움 탈탈 털어내고 집으로 가야지.
비가 내리고 있어서 얼른 떠나기로 했다.
기념품(바나나, 숙취해소제, 슈크림빵)과 완주메달을 받고
물품보관소에서 짐 찾아서 바로 지하철역으로 갔다.
컵 쌓기를 하면 숙취해소제를 주는데 줄이 너무 길기도 하고,
숙취해소제가 필요한 만큼 술을 마시지도 않기에 패스(살면서 숙취해소제를 먹은건 한두번 밖에 없었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바나나를 먹었다. 두 다리가 달달 떨리고 있었다.
고생한 내 두 다리. 38분 만에 들어오느라 정말 고생했다.
40~50분 걸릴 줄 알았는데 38분이라니 장하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반팔티를 입은 내가 지하철에 타자 사람들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얼마 안 있어 한기가 심해져 가방에 쑤셔넣었던 야샹점퍼를 입었다.
지하철에서 나오니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
완주메달을 딸아이에게 자랑했다.
완주메달은 책상에 올려놨다.
그날 마라톤 대회에 다녀온 게 다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하긴 38분이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니까.
완주메달을 보면 38분의 신기루가 손에 잡힌다.
이 경험이 너무 좋아 올해 2~3번 더 5km 대회에 나가지 않을까 한다.
대회 전까지만 해도
실력도 안 늘고 지루한 달리기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바뀌었다. 꾸준히 달려보기로.
대회에 나간 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칭찬해, 나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