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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뭉치 Sep 22. 2023

그만둘 결심

시작은 명함이었다. 입사 며칠 전 명함에 넣을 영문 이름을 알려달라길래, 김한민영이라는 이름으로 찍어달라는 요청을 답과 함께 보냈다. 아빠 성만 들어간 이름은 쓰지 않은지 한참 됐고, 전쟁없는세상에서는 아예 ‘민영’이라고만 쓰인 명함을 썼었다. 그러다 보니 성이 ‘민’이고 이름이 ‘영’인 줄 아는 사람이 많아서 아예 모부 성이 들어간 이름을 쓰려고 했던 거다. 내 요청에 당황하며 논의해 볼 문제라고 말할 때부터 쎄-했는데, 결국 돌아온 답변은 “노”였다. 이유는 “우리가 여성단체가 아니라서.”


그때 도망갔어야 한다. 팀장이 맘에 든다는 이유로 받아놓은 오퍼와 인터뷰 다 거절하고 들어갔는데, 결론은 내가 다쳤다. 나는 왜 늘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아는 걸까.


옷지적도 참고, 반말도 참고, 채식핀잔, 말랐다는 몸매지적도 다 참았다. 단체의 인종차별적인 메시지도 참고, 페미단속도 참고, 빈곤포르노도 참았다. 심지어 무슨 걷기 행사 참여하면 치킨주는 이벤트도 암말 안 함 (유일한 채식인 동료랑 뒷담은 깠지만). 우리 캠페인 잘 빌딩해서 세상에 내놓는 게 지금은 더 중요하니까. 그러려면 불화보다는 친절과 인내가 더 필요했다. 사실 불화할 기회도 없었다. 재택근무가 길었고, 협업구조도 아닌 데다, 다른 팀 사람들과는 말 섞어볼 일도 없었으니까. 근데 내가 다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연봉 천 몇백에 영혼 판 것 같은 기분에 젖어서 옷을 고르고, 겨우 맘을 추스르며 출근을 하고, 애써 웃으며 인사하고. 그러고 나면 밤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글쓰기든 독서든 전없세 활동이든 운동이든 뭐라도 쏟아내야 살 것 같았으니까. 입사하고 두 달 동안 평균 수면시간이 네 시간 조금 넘는 수준이니.


그러다 그날이 온 거다. 수습평가를 하자며 급히 잡힌 미팅에서 담당자가 말했다. “자기가 너무 진취적인 사람이라 우리랑 안 맞는 것 같아.” 귀를 의심했다. 뭘 보고 그렇게 판단한 거냐며 객관적인 평가결과를 내놓으라고 하자, 그건 그냥 보면 아는 거지 않냐며 말을 돌렸다. 나는 아직 어떤 입장을 보일만한 퍼포먼스를 내보인 적도 없고, 다른 팀과 오리엔테이션 이상의 교류를 해본 적도 없는데.


그나마 떠오르는 장면들은 이런 거다. 무지개 곰돌이, 페미티셔츠, 국제 쪽에서 나온 퀴어 컨텐츠로 설정해 놓은 컴퓨터 배경화면, 동물권 슬로건 타투스티커. 이것들을 몸에 두르거나, 내 눈에 잘 띄게 한 것 외엔 나의 입장이나 생각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게 그렇게 불편했나 보지. 내 타투스티커와 무지개곰돌이를 반가워해준 주니어 동료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여성 평화활동가 토크쇼에 패널로 초대받았다고 하니 대외활동 사전승인 규정을 만들어버렸던 일도.


“자기 일 너무 잘할 사람이라는 거 알아. 근데 우리가 준비가 안된 거야.”


사고회로가 고장 난 채로 그 미팅은 끝났다. 때마침 법원에서 오래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개명신청 허가. 명함 요청을 거절당한 날 바로 개명 신청을 했었는데 3개월을 넘게 기다린 결과가 딱 이 시간에 날아온 거다. 이건 분명 하늘의 계시야. 영혼 그만 팔고 나로 살라는 계시구나. 인생을 더 낭비하지 말자. 밤에 자고 낮에 살아있는 삶을 살자. 쓰레기들 사이에서 나도 쓰레기가 되기 전에 얼른 발을 빼야겠다. 두 달 만에 결심이 섰다. 그만둘 결심.


김민영으로 들어가서 김한민영이 되어 나오게 됐다. 그것만으로 큰 성과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거울도 보기 싫을 만큼 내 모습이 최고로 맘에 안 드는 시간을 살며 제일 많이 물었다. 자주 자책하면서. ‘이 안에서도 못 바꾸면 활동가 못해, 고양이들 부양하려면 이 정도 사회생활은 참아야 해, 사람들은 다 무난하게 사는데 너는 왜 그래.’ 이 따위 말들을 매일 같이 스스로에게 퍼부었다. 그 안에서 썩은 말들과 생각들이 맴도는 동안, 그러든 말든 나는 소중히 지켜야 할 존재들을 지켜야지. 그게 훨씬 빠르고 중요한 길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경제적인 안정,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별로 아쉽지도 않다. 가난하고 행복하게, 소중한 이들 곁에서. 다른 길이 열리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이제부터 산다. 김한민영으로. 친구들의 축하를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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