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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나 Jul 21. 2020

벌써 네 번째, 회사를 그만뒀다.

20대 후반의 봄에 나는 다시 백수가 되었다.



  시간과 돈, 노력을 쏟아부었던 무언가를 그만두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특히 나에게는. 대학을 다닐 때도 그랬다.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휴학을 하거나 자퇴를 할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존버-존중하며 버티기-다.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2년을 보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 전공 관련 일이었다. 졸업하자마자 제의를 받아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일은 재미도 없었고 실장님과도 잘 맞지 않았으나 적은 돈일지라도 꼬박꼬박 들어오는 돈을 포기하고 그만둘 용기는 없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같은 시간 아르바이트를 했어도 더 많이 벌었을 것 같긴 하다. 아르바이트 시급이 4,000원대였을 시절이고 아무리 페이 적기로 유명한 직종임을 감안하더라도 심했던 내 첫 월급은 주 6일 근무 기준 세전 120만 원이었다.

  나는 그때 월 60만 원을 저축하며 교통비로 20만 원을 썼다. 외근이 많았는데 외근 버스, 택시비는 내 몫이었다. 점심값이 아까워서 실온에 둘 수 있는 빵을 상자로 사다 놓고 하나씩 먹거나, 탕비실의 과자를 서랍에 몰래 가져다 숨겨두고 먹었다. 주 6일 중에 야근이 없는 날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그만두는 날은 생각보다 갑작스러웠다. 출근하고, 아침 회의를 하고, 점심을 먹고 퇴근 겸 퇴사를 했으니까. 실장님은 울었고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올려다본 밝은 하늘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도 몇 번의 회사를 옮겨 다녔다. 바다 건너 타향살이도 다녀왔다. 생각해보면 회사를 옮기는 주기가 조금 빠른 편인 것 같기도 하다. 회사가 망해서 강제로 백수가 되었던 경험도 두세 번은 되니까.    

 

  그리고 나는 또 회사를 그만두었다.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는 20대 후반의 봄-이라고 해서 어디 놀러 다닐 수도 없는 코로나 시대-에 나는 다시 백수가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퇴사는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쉬는 기간 동안 뭘 하고 뭘 배우고 하는 계획은 세우지도 못했다.

  뭐, 벌써 백수 두 달이 지나는데도 아직 계획 수립 중이기는 하다.

  노래도 잘 부르고 싶고, 사진도 많이 찍고 싶고, 사놓고 한 번밖에 못 해본 3D 펜도 연습해야 하고, 우리 집 늙은 개의 영상도 편집해야 하고, 공부한답시고 샀지만 포장지도 안 뜯은 원서 시집이나 만화책과 잔뜩 사다 놓은 책들도 읽어야 한다. 하긴, 난 계획을 세운다고 지키는 타입의 사람도 못 된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기도 꾸준히 써 본 적이 없지만 곧 다가올 나이의 앞자리 수 변경의 날까지는 20대 후반의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 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그 날의 날씨와 공기가 어땠는지를 기록해놓고 싶어서. 뭐 적어도, 메모를 하지 않아서 낭패를 본 적은 있어도 그 반대의 경험은 해본 적 없으니까. (옛날의 연애편지라던가, 흑역사 일기, 제2의 귀여니가 되고 싶었던 소설 습작 같은 건 논외로 두고서라도...)     




  요즘 나는 우리 집 늙은 개와 산책을 하거나, 느지막이 일어나 요가 매트를 깐 뒤 운동한 것 같은 기분만 살짝 내는 스트레칭을 하고, 생전 해본 적 없는 게임을 하느라 밤을 새우고, 디즈니나 픽사, 드림웍스의 영화들을 정주행 하고, 생각은 늘 있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던 봉사 활동도 다닌다. 엄마가 입이 닳도록 말하는 ‘생산적인’ 일은 단 하나도 하지 않는데도 나름 바쁘고 보람차다.

  물론 아, 내일은 꼭 해야지, 했던 걸 결국 또 다시 게으름 피우다 못하고 침대로 기어들어가는 새벽에는 조금 민망하긴 하다. 그래도 뭐, 언젠가는 하긴 할 것이다. 마음 먹기가 어려울 뿐.


  길게 이어지지는 못하겠지만, 최대한 만끽해야지. 20대 후반의 백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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