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철학수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준 May 25. 2024

멀어지다

선이란 무엇인가 - 교외별전(敎外別傳)

바쁘고 분주한 월요일이었다. 회사에서는 주말, 밤낮없이 연락이 오고, 여지없이 출근 길 지하철에서부터 해야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유독 정신이 없었다. 그 날은 한 달 전부터 잡힌 연주회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처음으로 함께 듣는 연주회 약속이었다. 약속시간이 다가올수록 연주회를 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 연주회는 직접적으로 내게 이익이 되는 활동이 아니었다. 정직하게 그 연주회를 기다리는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소중한 사람들의 시간을 지켜야된다는 그 마음 하나로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예술을 찾는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루종일 일하고, 주말도 밀린 집안 일, 개인 업무 처리하면 일주일은 문화,예술활동은 커녕 산책할 시간도 겨우 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같은 사람에게 영화, 연주회, 전시회는 다소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에 가까워지고 싶었던 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예술로 위로를 받기도 하고, 벅차기도 하고 대체 불가능한 감정들이 일으켜진다고 하기 때문이었다. 나와는 아주 거리가 먼 간접적인 욕망이었다. 스승이 "그 영화 참 좋더라." 하는 말을 알고 싶었고, "그 그림을 그렸을 당시의 화가의 마음이 느껴지더라." 하는 그 감성과 연결되고 싶었고, "그 음악은 매번 저를 울게 해요." 라는 친구의 눈물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었다. 그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 마음으로 연주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친구와 함께 옆자리에 앉았다. 그랜드 피아노를 앞두고 마음이 조금씩 튀어올랐다.  '여유가 없어서 시간을 내서 와야하는구나. 이렇게 나의 여유를 찾으러 와야 하는구나.' 하는 작은 마음이 스쳤다. 작게 피어난 새싹같은 그 마음을 시작으로 연주를 기다렸다.


그 연주회는 연주자와 관객의 거리가 참 가까운 하우스 콘서트였다. 연주자의 숨소리가 함께 들리고, 그의 땀방울과 막바지에는 흥건하게 젖은 땀이 눈에 보이는 거리였다. 그는 나이가 참 많았다. 그는 약 1시간 30분이 넘는 시간동안 연주하며 나를 포함한 모든 관객들을 이끌어갔다. 

어떤 곡인지도 모르고, 그가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나는 그 정도의 지식과 감수성을 갖춘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 순간 이 곳에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도 안 드는 건 아니지만, 한 번도 여행하지 않았던 곳으로의 여행하는 시간처럼 느꼈다. 그가 피아노 건반 하나 하나에 담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을 만나는 건 저렇게 만나야 하는 거구나 하는 그런 막연한 감정이 느껴져서 울컥했다. 그의 삶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말할 수 없는 연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욕심을 내자면, 온 마음을 다해 내 마음을 주고 싶었다. 더 욕심을 낸다면, 그의 삶에서 중요한 사람들, 부분들마저 다 껴안아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산산조각났다. 나의 조바심과 어리석음이 그 연주를 듣고 다 부서졌다. 마치 희곡의 대사를 외우듯이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음을 그가 그의 삶을 담아 치는 피아노 연주를 보며 알아버렸다.


'멀어지다' 라는 단어를 자주, 많이 떠올리게 된다. 나와 멀어지고 너와 가까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너와 가까워져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더 멀어졌던 순간들이 쌓이고 있다. 직접적으로 나를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 때문에 너한테 상처를 주었고, 너보다 내 자신이 컸다. 나뿐만 아니라 너와도 멀어지는 것에 자신이 없다. 내가 여기 있다고 손 흔들고 싶고, 드러내고 싶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너를 만나면 바로 뛰어가서 안기고 싶다. 그래서 내 인생은 참 무리하는 것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떻게든 너에게 보여지고 싶은, 직접적으로 가고싶은 마음 뿐이니까. 

하지만, 정말 '만난다.'는 것은 나, 너와 돌아돌아 멀게 가야한다는 것이다. 가까워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가까워질 수 있는 인연이 마주쳐질 때까지 계속 먼 곳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그 곳에서 해야한다는 것. 그래서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매 순간 너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나와 아직도 멀어지지 않은 것에 채찍질하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그 의심에 진저리가 난다.


연주를 듣고, 미술을 보고, 영화를 보는 것은 너와 만나는 길과는 참 멀다. 하지만 그것이 먼 거리에서 너를 만날 수 있는 길이었다. 항상 직접적으로 만나려고 해서 너를 만나지 못했나보다. 그 연주를 듣는 내내 너가 떠올랐던 것이 아닌데 연주회 후에 남는 건 이 마음이었다. 앞으로 참 나와도 멀어지고 너와도 멀어질 수 있는 연주를 들으러, 그림을 보러, 영화를 보러 가야겠다. 


너를 만나러 가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