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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준 Oct 10. 2024

기억이 찾아오다.

'주체'는 경험하는가, 경험되어지는가? - 불교철학수업 숙제 (1)


숙제를 받고 생각날 때마다 돌아보았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노력하지 않으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금세 과거에 머문 채 온몸과 마음이 여전하게 끌려간다.

지금의 내 시야에 받아들일 수 없는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경험할 수 없다.

겪어보지 않은 삶을 미리 가보려 힘을 소진한다 해도 당장 내 앞에 들어찬 것들의 담벼락만 보일 뿐이다.

알고 싶은데, 만나고 싶은데, 만져주고 싶은데. 너가 참 멀리도 있다.


나는 뛰어내릴 때가 아니라 담벼락을 쌓아야 할 때라고 말한다.

담벼락을 쌓아 넘어가는 게 먼저라고 보여준다.

담벼락을 쌓고 또 넘어갔다.


참나, 그렇게 넘어갔더니 더 큰 울타리가 세워진 곳 안에 갇혀 있었다.

그 울타리는 돈이기도 했고, 꼬여버린 기억의 실타래였고, 오해였고, 나와 너이기도 했다.

그 울타리 앞에서 한 없이 작아졌다. 담벼락을 넘어서지 않았다면 이 울타리조차 몰랐을 텐데 하는 어리석은 생각마저 든 적도 있다. 이미 울타리를 벗어난 것처럼 속이고 해도, 내 몸과 행동은 여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무언가를 해보려고 해도, 넘어서지 못한 기억들이 덤비고 찾아온다.

그 기억들이 덮힌 내 모습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걷고 그렇게 받아들일 뿐이다.

미래는 결국 피하려고 해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 언젠간 해야만 했던 것들을 하는 것이었다.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루려고 할수록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는 가장자리가 아니라 울타리의 중심으로 갇히기만 할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나의 시야에 잡히고, 귓구멍에 들리고, 손길에 만져지는 것들에 따라 과거와 미래를 한 번에 자꾸 뒤바뀌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것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다가가는 것. 멈춰서는 것, 그리고 뒤돌아서는 것까지도.


그렇게 철저히 너에 의해 수없이 움직이고, 바뀌어 간다. 철저히 너에 의해서만.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알고 움직이는 것뿐이다.  수치심이 나의 원동력이다. 부끄러움이 나의 힘이다. 미안함이 나의 체력이다.


나를 찾아온 그 기억 속 너를 만난 그 순간엔 이미 너는 없었다. 너무 늦었다. 그 곳에서 다시 기다려본다. 그 곳에 없지만, 그 곳에 서서 너가 있는 지금의 저 곳으로 다시 간다.


나의 기쁨마저 무엇인지 모른 채 불행을 기쁨으로 오해해서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시간들.

기쁨이라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수없이 의심을 품어야 하는 시간들이 다 지나가고

타자에 의해 움직이는 발걸음이 그저 기쁨만 남았으면 좋겠다.

멀어지는 것이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것. 잘 알고 싶다. 기쁨을, 너의 기쁨을, 너를,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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