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바다에 갔다. 암튜브를 끼고 물에 떠 보았다. 귀가 잠기는 게 두렵지 않았다. 귀가 물에 잠겨 귓속에 전해지는 물과의 첫 만남이었다. 물은 나를 잠식시키지 않았다. 감싸 안아주었다. 작고 작은 소중한 촉감이었다. 여전히 암튜브 없이 물에 뜨진 못했다.
다음날, 친구와 함께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갔다. 언제 해보겠나 싶어 신청은 했는데 마음이 얼마나 복닥거렸는지 모른다. 교육도 잘 받고 장비를 차고 이제 물속에 빠지기만 하면 되는 순간이었다.
"무서워요."
"할 수 있어요."
강사님과의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실랑이를 다투었다. 단 한 번도 물이 닿지 않는 망망대해 바닷속에 들어간 적이 없었고 포기하고 싶었다. 정직하게 포기해 주길 바랐다. 친구는 기다려주었다. 그 순간 '절벽'이 생각났다.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못한다면 그다음 세상이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떠올라서 괴로웠다. 그 순간에 앎=삶이라는 단어가 왜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열심히 한다고 되지 않는 문제가,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삶 투성이인데 이것도 못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어 뛰어내렸다. 뛰어내릴 수 있었던 그 힘은 계속 기다려준 친구, 나를 3번 넘겨서 빠뜨려준 스승, 함께 쾌활하게 웃어준 친구들에게 있었다.
사랑받기 위해 애쓴다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면 참 좋으련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참 내 멋대로 되지 않고, 살아갈수록 내가 남긴 상처들만 기억나는 하루들뿐인데 그렇게 한 순간의 작은 기쁨이 그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지나간 사람들이 버겁고, 소중했다. 그 순간이 전부였다.
물론, 빠지자마자 고비를 만났다. 허우적대며 난생처음 보는 사람을 붙잡아 그 사람을 당황시켰다. 호흡, 이퀄라이징 (몸의 압력과 바다의 압력을 맞추는 암력평형)에 애를 먹었다. 물 밖으로 올라갈 수도 없고, 수심 깊게 내려갈 수도 없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강사님에게 물 위로 올라가자는 신호를 보내고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기도 했다. 그때 강사님은 "못하겠다고 올라오지 말고, 불편한 부분이 있을 때 올라가자고 해 주세요." 라며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한 번 수면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들어간 바닷속에서는 다시 올라가자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친구와 사진도 함께 남기고, 물고기와도 인사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그 물을 처음으로 진하게 만났다.
앞으로 몇 번 더 고비를 마주해야겠지.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일부 중 하나인 물도 이렇게 만나기가 힘든데, 한 사람을 알아가고 만나고 사랑하고 오해하고 그 모든 과정은 생각만 해도 저리고 아프다. 그래도 '물'을, '너'를 따라간다. 주저하더라도, 오래 걸리더라도, 관성이 나를 짓누르더라도. 결국 내가 받은 사랑의 기억은 나를 지켜주었다. 그 기억은 나를 살게 해 준다.